2026 05+06 Vol. 305

소통·협력·공감한국원자력연구원의 새로운 기준입니다.

생각 나누기

산책을 말할 때 하고 싶은 이야기

‘산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이제부터 열심히 산책을 합시다’ 하는 캠페인은 아닌 것 같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제각각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해서 산책을 즐기며 살아가니까.

글. 재지마인드의 키키, 프랭키

우리만 해도 매일, 다양한 시간대에, 다양한 핑계로 산책을 한다. 무언가에 집중하다 잠깐 머리를 식히고 싶을 때라든지, 오래 앉아 있어서 목과 허리가 쑤실 때 밖으로 나가서 걷곤 한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곁에 있는 사람과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걷기도 하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산책을 나서기도 한다. 휴일의 나른한 오후를 조금 더 느긋하게 붙잡고 싶은 날이나, 여행지에서 아침 시간을 이용해 느리게 동네를 탐방하고 싶을 때도 천천히 주변을 산책한다. 때로는 다리를 다쳐서 깁스를 착용하고 있는 누군가가 목발을 짚어가며 산책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하는데 그럴 땐 ‘산책이 대체 뭐길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여 년 전에 개봉한 <연애의 목적>이라는 영화를 아시는지? 보신 분은 알겠지만, 강혜정 씨와 박해일 씨가 서로의 ‘사랑’ 내지는 ‘연애’의 목적을 가지고 옥신각신 다투는 장면이 시종 등장한다. 산책에도 목적이 있을까? 다들 이런저런 자신만의 이유로 산책을 즐기는 것 같지만, 적어도 우리의 경우엔 누군가를 설득하고 소리를 지르며 싸우다 결국 파국으로 치달을 만큼의 뚜렷한 목적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산책은 가벼운 것. 이렇다 할 만한 목적이 없어서 산책인 것이다. 만약 산책에 목적이 있다면 ‘자연스러운 내가 되는 것’이 아닐까.

산책을 할 때는 누구도 아닌 자연스러운 내가 된다. 이 시간만큼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도, 잘하려는 마음도 쓱 물러난다. 산책이 필요하다고 느꼈던 순간들을 가만히 돌아보면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지속된 경우의 끝에 찾아온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산책을 할 땐 자유로운 발걸음으로 내가 원하는 방향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디디면 그만이다. 자신을 믿은 채 지금 이 순간을 천천히 즐기면 된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흐름을 환기하기 위해 밖으로 나서는 것, 잠시 잊고 있던 편안한 내가 되는 것이 목적이라면 방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연히 낯선 골목을 마주했다면 끝까지 한번 가보기도 하고, 막혀 있으면 되돌아오면 된다. 그러면서 발견하는 새로운 카페나 음식점, 감각적인 공간을 지도 앱에 저장해두고 다음에 또 방문하자. 귀엽다고 느낀 장면들을 사진첩에 모아두자.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걸으며 만난 나, 그렇게 쌓인 경험들은 누구도 아닌 개인적인 취향이 된다.

도심을 휘적휘적 자유롭게 산책하는 걸 좋아한다. 이런 스타일은 우리가 여행하는 모습과도 닮아 있다. 도시를 자유롭게 걷는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선택지가 다양해서라고 말하고 싶다. 이쪽저쪽으로 펼쳐진 새로운 길과 골목을 기분 좋게 걷다가도 문득 눈에 보이는 세련된 카페 두 곳 중의 한 곳을 골라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만큼의 자유로움. 선택할 수 있는 것의 가짓수가 많다는 건 다양성이 확보된 세상 안에 있다는 안도감이기도 하다. 여러 선택지 중에 자신이 무엇을 고르는지 지켜보는 과정 또한 하나의 큰 재미이다. 많은 게 항상 좋은 건 아니지만 나를 잘 안다는 건 언제나 중요하다.

빌딩 숲의 즐비한 상점들을 구경하며 정처 없이 거닐다가도, 눈앞에 가로놓인 실개천을 따라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느티나무 아래의 벤치에 앉아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의 노래를 느끼며 잠시 쉬기도 한다. 이처럼 도시와 자연의 경관이 조화를 이루며 순식간에 그 풍경이 바뀌는 장소를 좋아하는데, 광화문 일대가 우리에겐 그런 장소다. 어떤 날은 서촌을 거닐다 수성동 계곡에서 숨을 돌리기도 하고, 그 길로 훌쩍 인왕산에 오르기도 한다. 또 어떤 날은 광화문광장을 걷다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두세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정동길을 차분히 산책하다 씨네큐브에서 예술영화를 관람하기도 한다. 다른 동네에 살면서도 한동안 이쪽을 자주 방문하는 우리를 발견하곤, 차라리 살아보자고 마음먹고 광화문 근처로 이사 오게 됐다.

산책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닮았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살고 싶은’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목적지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호기심이 이끄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가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재지마인드의
키키, 프랭키

유튜브 채널 ‘재지마인드’를 운영한다. 시간이 날 땐 산책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쓴다. 책 <재지마인드>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