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연구원의 새로운 기준입니다.
글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어? 이거 사람의 치아 아닌가.”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는 2023년 9월부터
‘공주 무령왕릉 및 왕릉원’(옛 송산리 고분군) 1~4호분을 발굴하고 있었다.
연구소 측은 발굴 과정에서 2호분 시신을 안장한 자리에 30 ㎝ 정도 쌓여 있던 자갈과 흙, 석회 등을
모조리 포대에 담아 옮겼는데, 그 양이 1.6 톤(1,575 ㎏)에 달했다.
그렇게 수거한 흙·자갈 등을 일일이 물체질로 걸러내던 중 어금니 2점이 나왔다.
여기서 과학이 동원됐다.
가톨릭대 해부학 교실이 치아가 맞물리는 부분의 마모도, 즉 교모도를 측정한 결과
주인공의 나이는 ‘20대 젊은 성인 혹은 미성년’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지금보다는 거친 음식을 먹었을 1,500년 전에는 현대인보다 빨리 치아가 마모됐을 것이다.
따라서 2호분의 주인공은 20대보다는 10대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2호분에서 시신이 놓인 바닥에 쌓인 자갈층을 거둬 물체질로 걸렀더니 치아 2점이 확인됐다. 가톨릭대 해부학교실이 치아를 분석했더니 치아의 주인공은 10대 청소년일 가능성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웅진 백제 시절 10대에 서거한 국왕은 삼근왕뿐이다. 때문에 ‘공주 왕릉원 2호분의 주인공=삼근왕’으로 지목됐다. /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제공
그렇다면 2호분의 주인공을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공주 무령왕릉 및 왕릉원’은 한성 시대(기원전 18~기원후 475)를 마감한 백제가 웅진 시대(475~538)에 조성한 왕릉 묘역이다. 웅진 시대의 임금이라면 문주왕(재위 475~477), 삼근왕(477~479), 동성왕(479~501), 무령왕(501~523), 성왕(523~554, 538년 사비 천도)으로 5명이다. 그중 주인공이 확인된 고분은 무령왕릉뿐이다. 재위 중 사비로 천도한 성왕을 제외하면 ‘공주 왕릉원’에 묻힌 임금은 4명의 국왕(문주·삼근·동성·무령왕)과 그 일가로 좁혀진다. 그런데 왕릉원의 구조를 살펴보면 크게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능원 윗부분에 475년 고구려 침공 때 전사한 개로왕의 가짜 묘(혹은 제사 유구)를 시작으로 1~4호분이 들어서고, 아래쪽에 따로 무령왕릉, 5~6호, 29호분 등이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구분하는 이유가 있다. 1~4호분은 한성 백제 시대(기원전 18~기원후 475)의 전통인 돌무덤이다. 475년 웅진 천도 직후 조성된 고분으로 짐작된다. 반면 밑에 조성된 무령왕릉과 6호분은 중국 양나라(502~557)에서 유행한 전돌 무덤이다. 5호, 29호분도 ‘돌방+전돌’ 양식의 고분이다. 따라서 ‘개로왕 가묘(제사 유구)·1~4호분’이 ‘무령왕릉·5~6호·29호분’보다 조성 시기가 빠른 것으로 파악된다.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가 2023년부터 웅진 백제 시대 왕릉급 무덤이 집중된 공주 무령왕릉 및 왕릉원 중 1~4호분을 발굴 조사했다. 그 결과 획기적인 발굴 성과가 나왔다. /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제공
왕릉원이 두 개의 영역으로 나뉜 이유는 무엇일까. 고구려의 침략으로 한성을 잃은(475) 개로왕(21대·재위 455~475)에게는 두 동생, 문주왕(22대·275~477)과 곤지(?~477)가 있었다. 문주왕은 재위 2년 만인 477년에 서거하고, 13살이었던 삼근왕(23대)이 왕위를 이었다. 그러나 삼근왕도 즉위 2년 만인 479년, 15살의 나이에 요절한다.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백제 왕계는 곤지의 후손인 동성왕(24대·479~501)과 무령왕(25대·501~523)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배경이 왕릉원이 ‘두 갈래’로 구분된 이유로 해석된다.
왕릉원의 위쪽(1~4호분)에는 문주왕(22대)과 삼근왕(23대) 등 문주왕의 직계가 묻힌 것으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 ‘치아 2점’의 주인공이 특정된다. 바로 문주왕의 어린 아들, 13살에 즉위해 15살에 생을 마친 삼근왕이 지목되는 이유다. 그렇다면 문주왕릉은 어디일까. 학계는 1~4호분 중 가장 먼저 조성된 1호분이 문주왕릉일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반대로 아래쪽에 조성된 묘역은 곤지계(동성왕–무령왕)의 무덤으로 보인다. 이 구역이 바로 무령왕릉과 5·6호분, 29호분이다. 무령왕릉의 주인공은 명확히 확인된 상태다. 그렇다면 바로 앞에 있는 6호분을 동성왕릉으로 볼 수도 있다. 무령왕릉에 버금가는 전돌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6호분의 주인공이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순타태자는 무령왕 재위 중인 513년에 이미 서거했다. 따라서 아버지보다 먼저 죽은 순타태자의 무덤이 6호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성왕릉은 어디일까. 왕릉원 구릉에서 서쪽으로 약 600 m 떨어진 교촌리 3호분이 동성왕릉으로 지목된다. 이로 인해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긴다. 왜 동성왕의 무덤은 무령왕과 떨어진 교촌봉에 자리 잡게 되었을까.
‘공주 무령왕릉 및 왕릉원’은 웅진 백제 시대에 조성한 왕릉 묘역이다. 웅진 시대의 임금은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 성왕 등 5명이다. 그중 중간(538년)에 사비로 천도한 성왕을 제외한 4명의 국왕과 그 일가가 공주 왕릉원에 묻혀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계추를 개로왕대(455~475)로 돌려보자. 개로왕은 동생 문주를 국무총리인 상좌평에 임명하고, 또 다른 동생 곤지를 일본과의 우호를 위해 사절로 파견한다(461). 곤지가 일본으로 간 사이 한성 백제는 고구려군의 침공(475)에 파국으로 치닫는다.
개로왕이 전사하자 국내에 남아있던 동생 문주가 왕위를 이은 뒤 웅진(공주) 천도를 단행한다. 문주왕은 476년 8월 해구를 국방장관 격인 병관좌평으로 삼는다. 문주왕은 477년 4월 주목할 만한 조치를 내린다. 13살이 된 맏아들 삼근을 태자로 책봉하고, 일본에 머무르던 동생 곤지를 귀국시켜 비서실장의 역할을 하는 내신좌평으로 삼았다. 문주왕은 곤지를 왕명을 수행하는 후견인으로 삼아 태자인 삼근을 보좌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곤지는 임명된 지 불과 3개월 만인 7월 죽고 만다. ‘477년 8월 병관좌평 해구가 권력을 농단하면서 임금까지 무시했으나 통제할 수 없었다’는 <삼국사기> 기사가 눈에 밟힌다. 해씨 세력이 일본에서 돌아와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로 등장한 곤지를 제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해씨의 만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삼국사기>에 비극적인 기사가 실린다. ‘477년 9월 해구가 도적을 사주해 사냥에 나선 문주왕을 시해했다’는 것이다. 해구는 13살짜리 태자인 삼근왕을 옥좌에 올린다.
이런 해구의 전횡에 진(眞) 씨 등 다른 귀족들이 반발한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러자 해구는 연씨 세력인 은솔, 연신과 결탁해 반란을 일으켰다. <삼국사기>는 ‘478년(삼근왕 2) 해구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왕이 덕솔 진로(?~497)에게 명하여 정예병 500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공격하여 죽였다. 연신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했다. 그러나 소년 삼근왕 역시 재위 3년 2개월 만인 479년 11월 서거하고 만다.
삼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석연치 않다. 비록 삼근왕이 해구의 반란을 진압했다고는 해도 한계가 분명했다. 원칙적으로는 해구가 옹립한 군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란을 진압한 진 씨 세력에 의해 폐위·살해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삼근왕이 갑자기 죽자 즉위한 이는 곤지계인 동성왕이었다. <일본서기>는 ‘삼근왕의 사후, 일본에 체류하던 곤지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동성왕이 왜의 호위병 500명을 이끌고 귀국하여 즉위했다’고 전했다.
이 대목에서 소환해야 할 두 인물이 있다. 곤지계인 무령왕과 그 이복동생인 동성왕이다. 무령왕은 461년, 아버지 곤지가 일본으로 가던 중 낳은 아들이다. 출생 직후 본국인 백제로 돌려보내졌고, 따라서 삼근왕이 죽었을 때(479) 만 18살이었던 무령왕은 왕위 계승권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무령왕보다 더 어리고, 일본에서 출생한 동성왕이 바다를 건너와 먼저 즉위한 것일까. 출신성분 때문일 가능성이 짙다. 동성왕은 아버지 곤지가 정식 혼인한 일본 왕실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녀다. 반면 무령왕의 친모는 곤지의 정식 부인이 아니다. 그래서 왕위 계승권이 동성왕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즉위한 동성왕은 왕권 강화와 민심 수습에 적극 나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초심을 잃었다. ‘500년 궁궐 동쪽에 호화 정자인 임류각을 세웠고, 연못을 파고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는 기사가 보인다. 동성왕은 501년 결국 인사에 불만을 품고 있던 백가라는 귀족에게 시해됐다. 반면 <일본서기>는 ‘동성왕이 무도해 포학했으므로 국인(國人)들이 왕을 제거하고 무령왕을 세웠다’고 다소 결이 다른 기사를 전한다. 이때 무령왕의 나이는 40세였다. 동성왕의 시해 사건 배후에 무령왕이 도사리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무령왕과 동성왕의 무덤이 뚝 떨어져 있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는다.

곤지계가 묻혔다면 무령왕릉 앞에 조성된 6호분은 무령왕의 이복동생인 동성왕릉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그러나 최근 무령왕릉보다 600 m 정도 떨어진 교촌리 3호분을 동성왕릉으로 지목하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같은 곤지계인데 왜 이복형제 사이인 무령왕과 동성왕의 무덤을 따로 조성했다는 해석이 나올까.
사실 치아 2점으로 고분의 주인공을 100 % 단정하기는 무리다. 물론 법의학자에 따르면 치아는 나이를 판정하는데, 인골보다 더 효과적이다. 그러나 치아만으로는 성별조차 판정하기 어렵다. 고고학 발굴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쾌도난마’이다. 무령왕릉처럼 이름표를 달고 나오지 않는 한 발굴 결과를 두고 ‘A=B’로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만약 추가 발굴 및 연구에서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온다면 어쩔 것인가. 그렇지만 한가지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공주 왕릉원 2호분에서 출토된 치아 2점은 5세기 후반 파란만장한 백제 역사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했다. <삼국사기> 등 사서에도 거의 거론되지 않았고, 게다가 13세에 즉위해서 불과 3년 2개월 만인 15세에 요절한 소년 삼근왕의 삶이 더욱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이것이 이번 발굴의 성과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