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 과학읽기

유용하 서울신문 과학전문기자
문화체육부장

가정에서 아빠가 양육에
더 적극적이어야 하는 이유

‘아버지의 시간’을 쓴 인류학자 세라 블래퍼 허디는 ‘양육은 여성의 것’이라는 생각은 시대에도 뒤떨어졌지만, 진화인류학적으로도 오류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북유럽 국가들에서 자녀 양육에 나서는 ‘라테 파파’들을 낯선 현상으로 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요즘은 국내에서도 과거와 달리 양육에 참여하는 남자들이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이런 상황에서 가정에서 남성들이 양육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이유를 뒷받침하고, 자녀 양육에 나서는 아빠들의 정신건강 관리와 관련한 연구 결과들이 나와 눈길을 끈다.

미국 위스콘신 매디슨대, 노터데임대 국제 보건 연구소, 케냐 암보셀리 국립공원 공동 연구팀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관계가 좋았던 딸의 수명이 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영국 왕립학회에서 발행하는 생명과학 분야 국제 학술지 ‘왕립학회 B 회보’에 발표했다. 물론 인간이 아닌 영장류를 대상으로 한 연구지만, 사람에게도 의미가 있다고 연구자들은 설명했다.

인간 이외에 수컷이 양육에 참여하는 포유류는 극히 드물다. 수컷의 양육 참여가 자손들에게 이익을 준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어린 시절 자식과 아버지와 관계가 생애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북유럽 국가들에서 자녀 양육에 나서는 ‘라테 파파’들이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다는 내용으로 뉴스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국내에서도 양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남성들이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 ⓒUnsplash

그런데, 개코원숭이 집단의 경우 수컷들은 젊을 때는 생식에 집중하다가 자식을 서넛 낳은 뒤에는 생식을 중단하고 ‘아빠 모드’로 전환하는 것으로 관찰됐다. 아빠 모드에는 주로 집에 머물며 자식들에게 시간을 투자하고, 짝짓기에 노력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연구팀은 동아프리카 암보셀리 동물원에 서식하는 암컷 개코원숭이 216마리와 그 아버지의 관계를 조사했다. 연구팀은 엄마의 보살핌으로 나타날 수 있는 영향을 제외하고, 아빠의 양육 행동이 딸에게 미치는 영향에 집중했다. 이 연구는 1971년에 시작돼 54년째 이어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장류 연구 프로젝트인 ‘암보셀리 개코원숭이 연구’(ABRP) 중 일부로 수행됐다. ABRP는 그동안 약 1,500마리 이상의 개코원숭이의 개체, 집단, 개체군 수준에서 생활사(史) 정보는 물론 유전학, 호르몬, 영양, 기생충학, 다른 종과의 관계 등 다양한 측면을 연구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암컷의 3분의 1 이상은 최소 3년 이상 아버지와 같은 사회적 그룹에서 함께 살았으며, 나머지 3분의 2는 아버지가 딸의 생후 3년 이내에 집단을 떠나거나 사망했다. 연구팀은 아빠 개코원숭이가 털을 손질해 주는 그루밍 행동으로 아빠-딸 관계의 잠재적 강도를 평가하고, 이것이 생존 기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했다. 그루밍 행동은 영장류 집단에서 위생과 사회적 유대감을 표시하는 행동으로, 관계 평가의 중요한 요소다. 사람으로 따지면 함께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거나, 밥상머리 교육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루밍을 자주 받는 등 아버지와 관계가 좋거나, 3년 이상 함께 거주한 딸들은 아버지-딸 관계가 약한 암컷들보다 2~4년 더 오래 살았다.

연구를 이끈 엘리자베스 아치 노터데임대 교수는 “수컷은 암컷들과 달리 새끼들의 사회적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역할을 하며, 딸들에게 일종의 안전지대를 만들어 준다”라며 “생애 초기 역경은 수명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이번 연구 결과는 아빠가 있다는 게 딸의 역경 극복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며, 아빠가 제공하는 사소한 도움도 중요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아치 교수는 “이 연구는 인간 부모의 보살핌 진화적 뿌리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라고 덧붙였다.

개코원숭이를 연구한 결과, 어린 시절 아버지와 관계가 좋았던 딸의 수명이 훨씬 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 ⓒShutterstock

엄마처럼 아빠들도 산전 · 산후 우울증 시달린다

그런가 하면, 호주 디킨대 보건학부, 멜버른 머독 아동 연구소, 멜버른대 왕립 아동병원, 뉴사우스웨일즈대, 제임스 쿡대 심리학과, 캐나다 트리니티 웨스턴대 상담심리학과 공동 연구팀은 산전·산후 기간 동안 아빠의 우울증, 불안, 스트레스 등 심리적 장애가 아이의 사회적, 정서적, 인지적, 언어적, 신체적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밝혔다. 이 연구 결과는 미국 의학회에서 발행하는 의학 분야 국제 학술지 ‘JAMA 소아과학’에 실렸다.

신생아 엄마들의 산전, 산후 우울증에 대해서는 많이 연구됐지만, 신생아 아빠들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미국의 경우는 신생아 아빠의 약 14 %가 산후 우울증을 경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신생아 엄마의 산후 우울증 비율과 비슷하다.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남성들은 정신적 스트레스나 압박감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어, 전문가들은 이 비율도 과소 평가된 것으로 본다.

출산 전후로 우울증에 시달리는 여성들처럼 남성들도 아내의 출산 전후로 우울증, 불안, 스트레스 등 심리적 장애를 겪는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이는 아이의 사회적, 정서적, 인지적, 언어적, 신체적 발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확인됐다. / ⓒShutterstock

연구팀은 출산 전후 아빠의 정신건강과 자녀의 발달 관계를 조사한 코호트 연구 48개를 메타 분석했다. 분석 결과, 아내의 출산 전후 아빠들이 겪는 우울, 불안, 스트레스 등 심리적 어려움은 아이의 정신적, 신체적 발달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확인됐으며, 이는 아동기까지도 이어지는 것으로 조사됐다. 또 아빠들의 심리적 어려움은 출산 전보다 출산 후에 더 심한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를 이끈 델리스 허친슨 호주 디킨대 교수는 “이번 연구는 아빠의 심리적 부담이 자녀 발달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이는 수정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라며 “아버지의 정신건강이 아동 발달과 전체 가족의 웰빙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확인한 만큼, 신생아 아빠들에게도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산후 우울증 같은 정신건강 관리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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