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호
창밖 매미 소리에 여름이 왔구나 깨달으니 아주 오래전 마음을 움직였던 기사가 떠올랐다. 이탈리아의 한 고등학교 교사가 내준 여름방학 숙제 15가지 리스트를 소개하는 기사였다. 그중 첫 번째 숙제는 ‘가끔 아침에 혼자 해변을 산책하라.’였고, ‘햇빛이 물에 반사되는 것을 보고, 네가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생각하고, 행복해지라’라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었다. 풍성한 삶을 위한 선생님의 가르침에 감탄했던 그 문장을 마음에 품고 묵호로 향했다.
3시간을 넘게 달려 도착한 묵호. 차를 주차하고 내리자마자 풍겨오는 바다 냄새에 묵호에 도착했다는 것이 실감 났다. 묵호는 요새 SNS에서 주목받고 있는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다. 서울에선 KTX로 2시간 30분이면 닿고, 이미 여행지로 유명한 강릉과 속초보다 고즈넉하면서도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 항구마을의 분위기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묵호는 지명과 관련된 설이 크게 2가지가 있다. 예로부터 바다도 검고 까마귀도 많아서 묵호동(墨湖洞)이라 불렸다는 설과, 학문과 선비가 있는 고장이기에 한묵(翰墨)의 뜻으로 묵호라고 붙여졌다는 설이다. 바다로 눈을 돌려본다. 수심이 예측되지 않는 깊고도 푸른 바다가 왜 검다고 느껴졌는지 알 것 같았다.
1937년, 묵호항이 무연탄 수출항으로 개항하며 화물선이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오늘날의 묵호가 만들어졌다. 사람이 모였고, 마을이 생긴 것이다. 해방 이후, 1964년에는 국제항으로 승격되면서 동해안 제1 무역항으로 자리매김한다. 석탄 수출은 미미해졌지만, 오징어와 명태가 잘 잡혀 장사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반짝이던 전성기도 잠시, 1970년대부터 어획량이 급감하고, 1980년대에는 동해항이 생겨나 항구의 기능이 분산되며 사람들은 떠나기 시작했다.
화려했던 과거사를 들춰보니 묵호가 점점 더 궁금해졌다. 일단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활어판매센터에 들렀다. 물회를 먹기 위해서다. 소금기 느껴지는 바람을 맞으며, 매대 위에 누워있는 생선들을 구경하다 이내 한 가게로 들어가 시원하고 새콤달콤한 물회를 먹었다. 기분 좋게 다음 행선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는 논골담길 벽화마을. ⓒ 한국관광공사, ⓒ Shutterstock
점심을 먹은 곳에서 5분 거리에 논골담길이 시작됐다. 논골담길은 4갈래의 골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등대오름길, 논골 1, 2, 3길 중 하나를 골라 묵호등대까지 올라가는 코스다. 물론 모든 골목을 누비며 구경해도 좋다. 골목마다 색색으로 수놓아진 벽화와 아기자기한 소품들, 여행객들의 목을 축일 수 있는 작은 카페들과 눈요기할 수 있는 소품샵 등이 골목골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논골담길은 다른 벽화마을과 다른 차별점이 있다. 벽에 그려진 그림들 모두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와 묵호의 역사가 담긴 그림이라는 것이다. 특히 오징어와 명태, 지게와 장화가 벽화에 자주 등장한다. 과거엔 언덕 꼭대기에 덕장이 있어 가난한 주민들이 오징어와 명태를 지게나 빨간 대야에 담아 덕장으로 날랐는데 그 이야기가 논골담길 곳곳에 새겨진 것이다. 지금은 골목을 시멘트로 마감해 큰 불편함이 없지만, 그 당시에는 길이 논처럼 질퍽질퍽해 장화가 필수였다고 한다. 이곳이 논골담길이라 불리는 이유기도 하다.
이 외에도 골목엔 만원을 물고 있는 강아지 그림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과거 전성기 시절 묵호는 ‘거리의 개들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라고 할 정도로 돈이 모이던 곳임을 상징하는 그림이라고 한다. 허투루 그려진 그림이 없는 이곳을 즐겁게 헤매듯 둘러보다 묵호등대에 올랐다. 바다부터 도시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올라 풍광을 한 번 더 감상했다. 아기자기하지만 깊은 이야기가 담긴 마을의 전경이 집에 돌아가서도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해 질 녘의 묵호 전경. 불빛으로 수놓아지는 저녁의 묵호도 아름답다. ⓒ 동해시청
스릴 넘치는 산책로와 액티비티가 마련된 도째비골 스카이밸리. ⓒ Shutterstock
바다를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 도째비골로 향했다. 묵호등대 바로 옆에 있는 도째비골은 스카이밸리와 해랑전망대로 구성돼 있다. 도째비는 도깨비의 방언이다. 어두운 밤에 비가 내리면 푸른 불빛이 나타났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를 도깨비불이라 생각해 도째비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스카이밸리는 해발 59 m 높이에 설치된 산책로인데, 일부 바닥이 강화유리로 되어있어 스릴 넘치게 바다를 경험할 수 있다. 더불어 이곳에서는 27 m 길이의 원통형 슬라이드를 타고 내려오는 자이언트 슬라이드와 와이어 위를 달리는 스카이 사이클 체험도 가능하다. 해랑전망대는 바다 위에 설치된 도깨비방망이 모양 교량이다. 여기도 일부는 강화유리와 메시 소재로 된 바닥이라 바다를 더 실감 나게 경험할 수 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른 곳이었지만, 묵직한 감동을 준 도시, 묵호. 잔잔함과 거친 파도를 동시에 품은 바다처럼, 묵호도 얕고 깊은 굴곡을 지닌 다양한 이야기를 도시 곳곳에 심어놓으며 여행객을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