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7+08 Vol. 306

소통·협력·공감한국원자력연구원의 새로운 기준입니다.

문화유산 깊이보기

한국과 인도를 잇는
가장 오래된 인연

허황옥(허황후)과 수로왕의 영정

경남 김해 구산동 수로왕비릉 경내에 매우 특이한 모습의 돌무더기가 서 있다. 자세히 보면 돌의 생김새가 심상치 않다. 돌에 붉은빛이 감돈다. 13세기 말(1281)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 스님(1206~1289)은 이 석탑을 친견하고 비슷한 소감을 피력했다. “탑은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일연의 언급처럼 돌무더기를 살펴보면 탑을 조성하면서 조각한 게 분명하다. 부재 아랫부분에 목조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공포(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에 짜맞추어 댄 나무쪽들)와 출목(서까래 받침을 위해 기둥열 밖으로 빠져나온 나무)의 흔적이 역력하다.

글.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일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명칭도 예사롭지 않다. ‘파사석탑’이다. ‘파사(婆娑)’는 범어로 ‘일체의 지혜가 나타나 증거한다’는 뜻을 지닌다. 신비스러운 의미를 물씬 풍긴다. 그런데 지난 2019년이었다. 특별전 ‘가야본성’ 전시를 위해 파사석탑을 옮겨온 국립중앙박물관은 고려대 산학협력단에 이 탑의 산지와 특성을 분석 의뢰했다. 그 결과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즉 암석이 지니는 자성인 대자율과 X-선 형광, 적외선 분광 등으로 들여다보니 석탑의 1~6층 재질이 상당량의 엽랍석을 함유한 사암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엽랍석은 주로 고온성 산성 열수(약 200~300도)로 생성된 2차 변질 광물이다.

또 이 석재에 붉은빛이 감돈 이유는 마그마 활동이 남긴 산화철 광물인 적철석이 불규칙하게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문제는 이러한 엽랍석을 함유한 사암은 한반도에서는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름 돋는 이야기다. “이 돌은 우리나라 것이 아니다”라는 일연의 언급이 떠오른다. 일연이 ‘외국산’이라고 단언한 것을 750여 년 후 첨단과학으로 증명된 셈이다.

인연의 시작

그렇다면 이 파사석탑은 어느 나라에서 가져온 것인가. 지난 4월 인도를 방문한 이재명 대통령이 그와 관련해 특별히 언급했다.

“2000년 전…고대 가야국 김수로왕과 인도 야유타국 허황옥(허황후)이 인연을 맺었다…허황옥의 배가 거센 풍랑을 만났을 때 배에 싣고 온 파사석탑이 파도를 잠재우고 길을 열어줬다…앞으로 더 많은 파사석탑을 쌓아가기를….”

대통령의 언급처럼 파사석탑은 ‘가락국(금관가야) 시조인 김수로왕과 인도(아유타국) 허황옥의 국제결혼’ 스토리를 간직한 유물이다. 자그마치 2000년 전이다. 이제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 과 ‘가락국기’ 등을 종합해 보자.

기원후 148년 5월 7일이었다. 서역의 아유타국왕이 딸(허황옥)을 불렀다. 아버지의 표정은 심상치 않았다.

“어젯밤 꿈에 황천(皇天)이 나타나 ‘하늘이 내려준 가락국왕 수로가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시집 보내라’고 말씀하셨다….”

이 명에 따라 16살 공주는 수행원과 시종 20여 명을 이끌고 가락국행 배를 탔다. 배에는 온갖 비단(옷)과 금은주옥, 구슬장신구 등 호화 혼수품을 잔뜩 실었다. 그러나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배가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국왕은 “풍랑을 가라앉히려면 이 ‘파사석탑’을 배 안에 실으라”고 명했다. 그러자 배가 순항할 수 있었다.

허황옥이 가락국으로 이동한 예상 경로. 각종 문헌사료의 일관된 서술은 허황옥의 고향이 인도(서역) 아유타국이거나 남천축국이라고 소개했다는 것이다.

무례하다, 신랑이 나와라

7월 27일, 두 달여 간의 항해 끝에 공주를 태운 배가 가락국 금관(김해) 앞바다에 닿았다. 마침 하늘이 점지해 준 신부를 기다리고 있던 가락국 수로왕은 구간(九干·9개 부족의 수장)을 보내 영접했다. 그러나 16살 공주는 “누군지 알고 그대들을 따라가겠느냐” 고 정색했다. 신랑이 직접 와서 신부를 맞이하라는 당당한 요구였다. 한 방 먹은 수로왕이 직접 공주를 맞이했다. 공주는 그제야 수로왕의 손을 잡았다. 수로왕 부부는 임시 궁궐을 마련해서 2박 3일의 신혼여행을 즐긴 뒤 8월 1일, 대궐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기록된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은 분명히 “공주(허황옥)가 기원후 48년 가락국에 올 때 배편에 ‘파사석탑’을 싣고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때 불교가 전래했다는 건가.

하지만 불교는 중국에는 기원후 1세기 중후반, 동남아에는 기원후 3세기 전후에 전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불교가 기원후 1세기 중반 중국-동남아를 훌쩍 뛰어넘어 한반도 남부까지 전해졌다? 납득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봇물이 터지듯 나왔다.

그러나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를 어영부영 쓰지 않았다. <삼국사기>(142종)보다 훨씬 많은 문헌(185종)을 인용했다. 필요한 경우엔 현장을 직접 답사했다.

예컨대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현전하는 유일한 가야사 관련 문헌 사료이다. 일연은 가락국기의 서두에 ‘가락국기는 고려 문종(재위 1046~1083)대의 대강(요 도종의 연호·1075~1085) 연간에 금관지주사 문인(文人·이름은 미상)이 편찬한 ‘가락국 본기’를 요약한 것’이라는 각주를 달았다. 족보가 있는 사서를 정리했다고 분명히 밝혀놓은 것이다.

가야에 닿은 불교

‘금관국 파사석탑’조는 어떠한가. 우선 일연은 파사석탑을 가야국행 선박에 실은 연유를 설명했다. 그런 뒤 가야의 불교 도입 시기를 아주 친절하게 설명한다.

“수로왕이 부인을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 년이었다. 이때 해동에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상교(像敎·불상과 불교의 교법)가 아직 들어오지 못해 토착민이 믿지 않았기에 ‘가락국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8대 질지왕 2년(452)이 되어서야 가야 땅에 절을 세웠다. 왕후사를 창건하여 복을 빌었고….”

일연은 불교의 ‘민간 소개’(기원후 48)와 ‘정식 도입’(기원후 452) 사이에 시간 차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또 하나 앞서 기사의 첫머리에 인용했듯 일연은 ‘파사석탑’조를 쓰기 위해 현장을 답사했다. 파사석탑을 보고 만지면서 육필 소감을 쓴 뒤 허황옥을 기리는 시까지 읊었다.

“석탑…신령에게 빌어 험한 물결 헤쳐왔다. 어찌 다만 황옥을 도와 건넜을 뿐이겠는가. 1000년 동안 남쪽 왜의 침략을 막았다.”(‘파사석탑’)

파사석탑. 현재 경남 김해 수로왕비릉 경내에 서 있다. 지금 경남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탑이 아닌 평형석

또 하나, <삼국유사>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허황옥이 배에 실은 호화 혼수품 목록에 파사석탑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파사석탑은 파도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 나중에 실은 물품이었다. 혼수품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해서 19세기 초 이학규(1770~1835)는 의미심장한 오언절구를 남긴다.

“가락국 허황옥이 서역에서 처음 올 때 큰 배에 돌을 실어 뒤집어지지 않게 하였다.”(<낙하생집>)

그러니까 허황옥이 배에 실은 것은 탑이 아니라 배가 뒤집히지 않게 바닥에 깔아 넣는 평형석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이 평형석이 훗날 가야 백성들이 불교를 믿게 되면서 불탑으로 조각되었을 수 있다. 물론 이 파사석탑이 처음엔 탑이 아니었다 해도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는다. 이 탑은 처음에는 이역만리 신랑을 만나러 오던 허황옥의 안전을 지켜주었고, 나중엔 왜의 침략을 막아내니 기도처로 그 임무를 완수했으니까….

아유타국인가 남천축국인가

허황후와 김수로왕의 혼인 이야기가 담긴 파사석탑과 가락국 이야기는 이후 일관되게 전해졌다. 조선 중기의 문인 학자인 허목(1595~1682)은 “태후의 성은 허씨다. 족보에는 아유타국 군주의 딸로 기록되어 있다. 금관국의 고사에는 남천축국 군주의 딸이라 했다. 태후 자신이 서역의 허국 군주의 딸이라 했다….”(<기언>)고 설명했다.

대중잡지인 <별건곤> 1934년 1월 1일 자는 “인도의 아유타국(혹은 남천축국) 왕녀인 허황옥이 풍랑에 밀리고 밀려서 우연히 가락국 앞바다까지 왔다”고 했다. 어쨌거나 허황옥의 고향은 서역(인도) 아유타국(고대 아요디아 왕국 추정)이거나 남천축국(남인도)이라는 인식이 굳어진 것이다. 그러니 허황옥의 고향은 크게 봐서 현재의 인도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삼국유사>는 “수로왕이 허황옥을 아내로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同御)이 150여 년이었다”라고 기록했다.

한·인도 공동정부?

기원후 1세기 무렵이라면 가야가 낙동강~남해로 이어지는 해양 수송로를 통해 활발한 교역을 벌이던 때였다. 그러니 허황옥을 중심으로 한 외국인 해상세력이 가락국 임금과 이른바 결혼 동맹을 맺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 대목에서 <삼국유사>는 “수로왕이 허황옥을 아내로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同御)이 150여 년이었다”(‘파사석탑’)고 기록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허황옥은 김수로왕보다 10여 년 연상이었다. 가락국에 도착한 허황옥은 ‘김수로왕이 직접 영접하지 않은 것’을 두고 호되게 나무랐다. 당찬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기록대로라면 어떤가. 가야는 김수로왕과 허황후가 150년 이상 공동정부를 구성했다는 뜻이 된다. 한국-인도 간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