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3+04 Vol. 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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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깊이보기

부실 공사의 원조 석굴암?
1200년 동안 무너지지 않는 이유

“인도를 버릴지언정 셰익스피어를 버리지 못한다던 영국처럼, 우리에게는 석굴암이 있다.”
미술사학자 고유섭의 ‘석굴암 찬가’다. 일제강점기 일본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도 “석굴암은 영원한 걸작이다. 동양문화가 최고조였을 때 그 영기(靈氣)를 모아 신라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날 석굴암은 조명받는 본존불을 훑고 빠르게 지나쳐버리는 관광지가 됐다. 창건 당시에도 그랬을까. <삼국유사>에 의하면 석굴암은 김대성이 751년(경덕왕 10) 불국사와 함께 창건했고, 774년(혜공왕 10) 김대성 사후, 국가가 공사를 마무리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지금의 모습은 과연 창건 당시와 같을까.

글.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석굴암 물고문

‘1913~15년 철근 콘크리트로 덮었지만…이듬해 여름부터 큰비에 젖은 듯 흘러내리며 푸른 이끼가 끼어…이는 동해 안개와 구름이 굴 내에 침입해 빠져나갈 길을 잃어….’ 1937년 12월 2일 자 조선일보 기사다. 일제강점기의 해제·보수 이후 20여 년간 지속적인 ‘물고문’을 받은 석굴암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신문은 ‘콘크리트로 돔을 씌우고 바닥까지 시멘트로 다진 당시의 공사담당자는 그만하면 천세에 남으리라고 믿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모양…’이라고 덧붙였다. 사실 19세기 후반 개발된 콘크리트 공사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공법이었다. 그러나 공사 후 이듬해 여름부터 사달이 났다. 콘크리트 돔 때문에 환기가 되지 않아 전에는 보지 못했던 이슬이 흘러내려 굴 안이 물바다를 이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누수와 외기에 따른 석굴암의 훼손 문제가 해방 후에도 계속됐다. 그러자 대규모 수리 복원공사가 이뤄졌다. 공사는 1958년 계획돼 1961년 9월 본격 시작됐으며, 2년 9개월 만인 1964년 6월에 완료된다. 수리·복원공사의 핵심은 한가지였다. ‘습기와의 전쟁에서 석굴암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럴 만도 하다. 일제강점기부터 지적되었듯이 석굴암은 토함산(해발 745 m)의 해발 565 m 부근에서 동해안의 해풍을 온몸으로 맞서고 있다. 측정결과(1962) 석굴암은 1년 365일 중 사흘에 한 번씩 비가 내리거나(130일), 안개가 낀(123일) 것으로 측정됐다. 쾌청한 날은 겨우 100일뿐이었다. 그 때문에 공사 계획 단계(1958)부터 ‘석굴암의 이중 돔과 앞 공간의 기와집 설치’가 핵심 전제 조건이 됐다. 하지만 공사 후부터 지금까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연구자들이 생겨났다.

1913~15년 사이 일제는 석굴암 수리 공사를 펼치면서 콘크리트로 돔을 쌓아 복원했다. 19세기 후반 개발된 콘크리트 공사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공법이었다. 그걸 석굴암 수리 공사에 적용한 것이다.

석굴 아닌 석불

먼저 지금처럼 석굴암에 기와집 형태를 갖춘 전실이 과연 존재했던 것일까. 사실 옛 문헌자료가 예사롭지 않다. 17~19세기 석굴암을 방문했던 정시한(1625~1707), 이덕표(1664~1745), 임필대(1709~1773), 송달수(1808~1858)의 언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석불은 사람의 노력으로 만든 것…석문(돌문) 밖 양쪽 가장자리에는 큰 바위에 불상 4~5위씩 새겨져…석문은 무지개처럼 다듬어져…굴 위에는 뚜껑 돌과 여러 돌이 올려져 있는데 바르고 깔끔하여 기울어지거나 흠이 있는 곳이 하나도 없다….’(정시한의 <산중일기>), ‘석굴암에…다듬은 돌을 쌓아 동굴 모양으로 만들었으니 흙집(土宇)과 같고 좌우의 석면에 모두 불상을 새겨두었다….’(이덕표의 <우와집>), ‘용마루나 처마 없이 돌로 쌓아 굴을 만들었다. 문설주와 문지방으로 막지 않고 돌로 문을 삼았다.’(임필대의 <유동도록>), ‘돌로 방을 만들고 아래부터 위까지 돌로 층층이 둘렀으며 우산 같이 둥근 형상…밖에 흙을 쌓아 봉우리처럼 우뚝 솟았다.’(송달수의 <남유일기>)

석굴암은 야외에 노출된 석불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1913~15)와 1958~64년 수리를 거치면서 콘크리트 이중 돔과 기와 건물 속에 안치됐다.ⓒ Shutterstock

석굴 코스프레

1960년대 석굴암 수리공사단이 공사 과정에서 찾아낸 ‘석굴암 중수 상동(량)문’의 내용도 예사롭지 않다. 이 상량문은 1891년 석굴암을 중수한 내용의 기록이다. 상량문은 ‘…돌방의 구조는 굉장하고 훌륭…붉고 푸른 이끼가 낀 돌의 형세는 들쭉날쭉…주옥같던 누전(樓殿)은 풀더미 우북한 마당에 묻혔다…’고 했다. 돌에 이끼가 끼고 퇴락했다는 구절이 있지만, 굴에 조성했다든지 하는 표현은 없다. 이제 선입견을 깨부숴야 한다. 각종 문헌자료는 ‘석굴암은 자연 동굴이나 벽면을 파서 만든 암자가 아니’라고 이구동성하고 있다.

‘돌로 쌓은 다음 그 위에 흙을 덮어 마치 석굴처럼 조성했다’고 언급했다. 한마디로 ‘석굴암은 굴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석굴암 앞 공간에 기와건물이 조성돼 있다고 묘사한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신라인들은 왜 노천에 석불을 조성하고 흙으로 덮었을까. 이 대목에서 신라인들의 불심을 가늠하게 된다. 단단한 화강암 지형으로 이뤄진 한반도에서 석굴을 파기는 매우 힘들다. 그래서 신라인들은 돌과 흙으로 석굴을 만들었다. ‘석굴 코스프레’를 해서라도 불심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젖은 부처님

그런데 2025년 10월 경주 APEC 개최 기념 석굴암 학술대회에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소개됐다. 18세기 경주 향교의 직원인 이덕표(1664~1745)가 1704년 9월 16일 석굴암을 답사한 뒤 남긴 글이다. ‘…옛날에 석불에 청동제 기와를 덮었다. 어느 날 석불이 절간 스님의 꿈에 나타났다. 석불은 ‘나는 본디 젖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하늘의 비와 이슬이 방울로 떨어져 나의 몸체를 씻고 영원(靈源)으로 흘러내려 그 혜택이 중생들에게 미치려 하는데 어찌 이를 덮으려 하는가’라 했다. 잠에서 깬 스님이 그 기와를 벗겨냈다.’

또 모산 백순우(1863~1942)의 <남유록>은 ‘과거 석굴암에서 천정수가 떨어지는 등 본래 내부에 습기가 있는 것이 정상인데, 일본인들이 파괴해 이끼 때문에 오염되니 애석하다’라고 했다. 즉 석굴암은 본래 내부에 습기가 차 있어야 정상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와 1960년대에 콘크리트 돔을 쌓고, 앞에 기와 건물을 지어 외부 습기를 철저히 막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늘의 비와 이슬로 중생의 몸체를 씻으려 했던 부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채 멋대로 손을 봤다는 얘기가 된다.

석굴암 본존불 머리 위의 천장에 연꽃 문양의 천개석이 세 부분으로 균열 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석굴암 창건자 김대성은 본존불 위 천정의 천개석(덮개돌)이 세 조각 났는데도 공사를 강행한 것으로 보인다.

부실 공사의 원조?

석굴암의 신비를 더 살펴보자. 석굴암 본존불 머리 위 천장엔 꽃문양이 조각된 천개석이 보인다. 원형 돔을 쌓은 다음 맨 마지막에 올려놓는 덮개돌이다. 그런데 천개석이 세 부분으로 균열 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시할 수 없는 흠결이다.

<삼국유사>에서는 ‘큰 돌 하나를 다듬어 천개석을 만드는데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김대성이 분하게 여기다가 어렴풋이 졸았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 만들어놓고 돌아갔다.’(‘효선·대성효이세부모’조)고 했다. 김대성이 덮개돌을 다듬다가 그만 돌을 세 조각 냈는데, 모르는 체하고 공사를 마무리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돔 구조물의 경우 정상 부분에는 바깥으로 잡아당기는 인장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압축력만 나타난다. 그러니 끄떡없다. 쪼개진 모양이 불안정해 보일지언정 그 조각이 실제 떨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판테온보다 3배 밝다

또 하나 앞서 밝혔듯 1960년대 수리 공사 후 석굴암의 내부는 실내로 변형되어 어두컴컴해졌다. 석굴암 본존불이 굴 안 어두운 공간에 갇힌 격이다. 하지만 1910년대 사진을 보면 실외에 노출된 석굴암은 그렇게 어두워 보이지 않는다. 로마의 판테온 실내와 석굴암 내부 공간의 바닥 조도를 비교해 보면 어떨까. 석굴암의 바닥 조도가 판테온보다 3배 이상 밝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촛불 혹은 조명 시설이 없는 석굴암을 암흑의 공간으로 여긴다. 대단한 착각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변형된 석굴암을 어찌해야 하는가. 무자비한 습기를 감당할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중생을 위해 습기를 가득 머금은 부처의 상이 석굴암의 원형일지 모른다는 견해도 그냥 넘길 일이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