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사랑의 묘약인가, 미의 표현인가
‘비단벌레 금동관’ 쓴 15세 신라 여성

2024년 12월, 경주 황남동 120-2호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을 정리하던 중 뜻밖의 사실이 드러났다.
금동관 장식의 ‘거꾸로 된 하트 모양’ 구멍을 비단벌레 날개로 메워 장식했음이 확인된 것이다.
보존 처리 결과, 대부분의 날개는 검게 변했지만 일부는 여전히 본래의 영롱한 빛깔을 간직하고 있었다.

1975년 7월 황남대총 남분에서 확인된 비단벌레 날개 장식 말안장 가리개. 용무늬로 도려낸(투조·透彫) 금동판 밑에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 장식한 것들이었다. /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영롱한 빛깔

비단벌레 날개 장식품 하면 먼저 떠오르는 고분이 있다. 1973~1975년 황남대총에서 확인된 말갖춤새이다. 특히 황남대총 남분에서 수습된 말안장 앞·뒤 가리개가 이목을 끌었다. 영롱한 빛을 발하는 비단벌레 날개 장식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금동판에 용무늬를 투조(透彫)로 도려낸 뒤, 그 밑에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 장식한 것이었다. 발굴단은 ‘큰일이다’ 싶었다.

수백·수천 년 밀폐된 공간에 있던 유기물이 바깥으로 나와 공기와 닿게 되면 어찌 되는가.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바짝 말라버리고 과자처럼 부스러지면서 변색된다. 발굴단은 곧바로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이던 화학자 김유선 박사에게 연락했고, 동시에 물에 적신 탈지면으로 장식을 덮어 밀폐 상자에 보관했다.

며칠 후 김 박사가 글리세린 액체가 담긴 플라스틱 통을 들고 왔다. 그는 “나무상자에 이 용액을 붓고 말갖춤새를 통째로 넣으라”고 했다. 이 용액은 화장품(로션)을 만들 때 쓰는 재료였다. 발굴단은 김 박사의 말대로 말안장과 발걸이, 말띠드리개, 말띠꾸미개 등 비단벌레 장식 유물 모두를 용액에 담갔고, 이는 ‘신의 한 수’였다. 꼭 5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유물 세트는 글리세린 용액에 담겨 있다. 덕분에 1500년 이상 본연의 색을 유지한 유일한 비단벌레 날개 장식품이 되었다.

사랑의 미약

2006년 황남대총 남분 출토 말안장 뒷가리개의 복원 때 쓰인 비단벌레는 1,500여 마리에 달했다. 그런데 비단벌레는 안장 뒷가리개에만 쓰이지 않았다. 앞가리개를 비롯한 각종 말갖춤새에도 비단벌레 날개가 쓰였다. 결국 3,000~4,000마리의 비단벌레가 잡힌 셈이다.

1,500년 전 얼마나 많은 신라인이 동원되어 수천 마리의 비단벌레를 잡으려고 동분서주했다는 얘기인가.

그렇다면 왜 비단벌레 날개일까. 예부터 곤충은 알에서 애벌레로, 또 애벌레에서 성충으로 변태하는 성질 때문에 다산·재생·부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영화 ‘쥬라기 공원’을 보면 공룡이 호박 속에 갇힌 모기의 피에서 부활하지 않는가. 그중 녹색과 갈색 바탕인 비단벌레의 몸은 보는 각도에 따라 금색이나 붉은색 등 영롱한 빛을 낸다. 7~8개의 층층 구조인 다른 곤충과 달리 비단벌레는 17개의 층층 구조를 가지고 있어, 얇은 층이 겹겹이 쌓인 딱지날개가 빛을 받으면 각 층에 반사되는 각도에 따라 오색찬란한 빛을 내기 때문이다. 비단벌레가 영어로 ‘주얼 비틀’(Jewel beetle·보석 딱정벌레)인 이유가 그것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기록도 있다. 이규경(1788~ 1856)의 <오주 연문 장전 산고>에 따르면 “비단벌레를 허리띠에 둘러차고 다니면 서로 사랑하게 만드는 미약(媚藥)의 효능이 있다”라고 했다. 곧 사랑의 묘약으로 여겨진 것이다. 따라서 비단벌레는 왕·귀족 등의 몸을 치장하고, 또 애마를 치장하는 귀한 장식품으로 쓰였다.

녹색과 갈색 바탕인 비단벌레의 얇은 층이 겹겹이 쌓인 딱지 날개가 빛을 받으면 각 층에 반사되는 각도에 따라 오색찬란한 빛을 낸다. 비단벌레를 영어로 ‘주얼 비틀’(Jewel beetle·보석 딱정벌레)인 이유가 그것이다.

딸린 고분의 정체

풀어야 할 숙제는 또 있었다. 이번에는 황남동 고분에서 신라 최초로 ‘비단벌레 날개 장식 금동관’이 확인됐다. 바로 황남동 120호분이다. 이 무덤은 경주 고분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한다.

2018년부터 시작된 발굴작업에서 120호분의 일부를 깎고 조성한 고분 두 기, 120-1호와 120-2호가 새롭게 드러났다. 이 중 120-1호는 크게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상감유리구슬, 가슴 장식, 곱은옥, 금제 드리개 등이 출토됐다. 이 유물은 금동관의 장식품일 가능성도 있다. 핵심은 120-2호였다. 주인공의 머리 쪽에서 금동관이, 발 쪽에서 금동신발이 확인됐다. 이외에도 각종 금은동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두 고분을 거느리고 있는 120호분에서도 의미심장한 유물이 출토됐다. 시신의 밑에 덩이쇠를 여러 점 깔아놓은 것이다. 덩이쇠는 부와 권력의 상징물로, 금괴처럼 돈으로도 쓰였고, 실제로 철제도구를 만들 때도 사용되었다. 주인공의 머리 부분에서 금동관모와 은제 관장식, 목과 가슴 부근에서는 금제 가는고리 귀고리 등이, 허리 부분에서 철제 큰 칼 등이 함께 출토됐다.

2006년 황남대총 남분 출토 말안장 뒷가리개의 복원 때 쓰인 비단벌레는 1,500여 마리에 달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170 ㎝ 장신 부인

이 세 고분의 주인공은 어떤 관계일까. 세 고분의 주인공 관계를 두고 학계는 120호분 주인을 최상위 귀족 남성으로, 120-1·120-2호를 그의 부인들로 추정한다. 봉분의 지름(28 m)이 왕릉급(평균 40~60 m)은 아니어도 중형급 정도는 되기 때문이다. 고고학계에서는 무덤 주인공이 ‘가는고리 귀고리’와 ‘큰 칼’을 착장했다면 ‘남성’으로, ‘굵은고리 귀고리’와 ‘은장도’, ‘가락바퀴’ 등을 착장하면 여성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가는고리 귀고리’와 ‘큰 칼’ 등이 출토된 120호분의 주인공은 남성으로 판단됐다. 반면 ‘굵은고리 귀고리’와 금은장도를 착장한 120-2호와, 120-2호와 무덤구조 및 출토유물이 비슷한 120-1호는 여성 무덤으로 여겨졌다. 더불어 120호분의 연대는 5세기 후엽으로, 120-1, 120-2호분은 6세기 초로 추정됐다.

그러나 발굴 결과는 기존의 선입견을 흔든다. 120호분에는 주인공의 다리 부분에서 정강이뼈로 추정되는 인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흔적과 주인공이 착장한 유물의 양상을 고려해 신장을 측정해 보면 ‘165 cm 이상’으로 추정되지만, ‘여성’으로 짐작되는 120-2호 주인공은 금동관에서 금동신발까지의 길이를 재본 결과 최소한 ‘170 cm 이상’으로 확인됐다. 즉 부인의 키가 남편보다 컸던 셈이다.

재벌과 공주의 정략결혼?

선입견에 반하는 또 하나의 발굴 결과는 ‘금동관’과 ‘금동신발’이다. 120-2호에서는 남편으로 추정되는 무덤에는 없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 금·은·동 장신구 풀세트가 쏟아져 나왔다. 이는 부인의 신분이 남편보다 높았음을 시사한다. 그 정도의 위상이라면 신라 왕족 여성일 가능성도 있다. 반대로 120호의 주인공은 무덤 바닥에 덩이쇠를 깔아놓았다. 이는 막대한 부를 지닌 ‘재벌’임을 보여주며, 정략결혼의 방증일 수 있다. 당대 철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당대의 ‘재벌’(120호)이 신라 공주(120-2호)와 정략결혼을 한 것이 아닐까.

12~15세 여성과 3세 유아

그러나 반전의 이야기도 있다. 2024년 9월, 120-2호 유물을 정리 과정에서 분석팀은 금동관 주변과 금동신발 아래에서 치아 두 점을 발견했다. 분석 결과, 금동관 부근의 치아 두 점은 무덤 주인공의 아랫니 중 제1·2대구치(앞어금니 뒤쪽에 있는 치아)로 확인됐다. 이 치아의 연령은 12~15세로 추정된다. 물론 치아만으로 성별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발굴 자료에 대입해 보면 120-2호의 주인공은 ‘12~15세 여성’으로 좁혀진다. 금동신발 아랫부분에서 확인된 치아의 주인공은 성별 불명의 3세 전후 아이로 분석됐다.

발굴단은 주인공(12~15세 여성)과 순장자(3세 전후의 아이)로 파악했다. <삼국사기>에는 502년(지증왕 3년) 순장이 국법으로 금지됐다는 기록이 있는데, 120-2호분은 6세기 초 무덤인 만큼, 이 아이는 12~15세 여자 주인공이 죽자 함께 묻힌 ‘국법이 금한 마지막 순장 희생자’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처음엔 금동관 곳곳에 뚫어놓은 ‘역 하트 모양’의 구멍에 흙이 붙어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보존 처리 도중 이것이 비단벌레 날개임을 확인했다. 비단벌레 날개 장식은 13곳에서 15장이 수착(흡착과 흡수가 동시에 진행된 상태)된 채로 발견됐다. /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출산의 흔적은 뭔가

그러나 신라 사회가 3세 아이를 순장시켰을까 하는 의문도 남는다. 학계 일각에서는 20-2호분에 묻힌 3세 아이가 순장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만약 그렇다면 12~15세 여성과 3세 전후의 아이는 어떤 관계인가. 혹 엄마와 자녀 관계가 아닐까.

하지만 3세 아이의 부모가 되기엔 12~15세 여자가 너무 어리지 않을까. 그러나 3세, 12~15세는 ‘만’ 나이이다. 한국 나이로 치면 5세, 14~17세가 된다. 만약 120-2호의 주인공이 만 15살이라면 한국 나이 17살이다. 충분히 출산과 양육이 가능하다. 실제로 사천 늑도에서는 1~2회 가량의 출산 이력을 보인 10대 후반의 여성 인골이 확인된 바 있다.

이처럼 경주 시내 대형 고분 가운데 가장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던 황남동 120호분은 1500년 전 신라 역사를 상상케 해주는 ‘이야기 창고’가 되었다. 앞으로 또 어떤 새로운 비밀이 밝혀질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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