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 과학읽기

유용하 서울신문 과학전문기자
문화체육부장

노화, 우울, 불안
알고 보니 개인 아닌 사회 문제였네

또래보다 나이 들어 보이거나 비만에 시달리고,
우울함이나 불안 같은 신경성 질환에 고통받는 이들을 보면
‘도대체 자기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라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겉늙어 보이는 것이나 만성질환, 신경정신 질환을 개인 책임으로만 돌릴 수 있는 것일까.

칠레,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미국, 아일랜드, 베네수엘라, 이집트, 나이지리아, 영국, 브라질, 카메룬, 인도, 케냐, 캐나다, 스페인, 벨기에, 호주, 페루 18개국 43개 연구기관과 대학 소속 뇌· 신경 과학자, 의학자, 공학자, 생물학자, 심리학자, 통계학자로 구성된 국제 공동 연구팀은 정치적 불안정, 환경 조건, 사회적 불평등이 노화를 가속한다는 사실을 의학 분야 국제 학술지 ‘네이처 의학’(7월 15일 자)에 발표했다.

건강한 노화는 삶 전반에 걸쳐 경험하는 여러 요인에 의해 형성되는 복잡한 생물학적 과정이다. 유전자를 변화하지는 않지만, 노화에 관여하는 물리, 사회, 정치 등 다양한 환경적 요소를 ‘엑스포좀(exposome)’이라고 한다. 최근 많은 연구에서 시간 변화보다 엑스포좀이 건강한 노화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그렇지만 엑스포좀이 인종별, 지역별로 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연구팀은 엑스포좀이 건강과 질병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 분석 틀과 생물행동 연령 격차(BBAGs)로 가속 노화 정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BBAGs는 실제 나이와 건강, 인지, 교육, 신체 기능성, 심혈관 건강, 감각 장애 같은 항목을 측정해 예측된 나이와 차이를 보여주는 지표다. 연구팀은 새로 개발한 방법으로 유럽,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4개 대륙, 40개국 16만 1,981명을 대상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BBAGs와 실제 나이의 차이가 큰, 이른바 가속 노화를 경험한 사람들은 저속 노화를 경험한 사람들보다 일상적 작업 수행 능력이 8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지고, 인지 저하 가능성은 4배 높은 것으로 확인됐다. 가속 노화는 아프리카 지역의 저소득 국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동남아시아, 남미 지역 국가들이 그 뒤를 이었다. 반면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같은 유럽 국가들 사람들은 더 건강하게 나이 들어가고, 저속 노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특히 엑스포좀 영향을 더해 분석할 경우, 국가 수준에서 건강한 노화를 예측하는 주요 요인이 밝혀졌다. 여기에는 대기질, 깨끗한 물 같은 물리적 요인, 사회경제적 평등, 성별 평등 같은 사회적 요인, 정치적 자유, 민주주의적 환경 등 사회정치적 요인이 포함됐다.

노화는 단순히 개인의 노력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외부 요인에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Pixabay

연구를 이끈 아일랜드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 아구스틴 이바네즈 교수는 “이번 연구는 개인이 건강하게 노화하는지, 가속 노화하는지는 개인의 선택이나 생물학적 조건뿐만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물리적, 사회적, 정치적 환경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이바네즈 교수는 “고령화 사회에서 공중보건 전략은 단순히 개인의 생활 방식 변화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으로 구조적 불평등과 거버넌스의 결함을 해결하는 것도 포함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런가 하면, 영국 뉴캐슬대 뇌과학 연구소, 노섬브리아대 사회복지·교육학과, 요크대 보건과학과, 프랑스 파리 고등사범학교 인지과학과 공동 연구팀은 식량 불안정이 불안과 우울증 유발에 직접적 요인이 된다는 연구 결과를 보건학 분야 국제 학술지 ‘플로스 정신 보건학’(7월 17일 자)에 발표했다.

정신 건강은 개인의 성격과 스트레스 취약성뿐만 아니라 사회·환경적 요인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특히 식량 불안정은 불안과 우울증 발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알려졌지만, 관계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식량 불안정은 정상적인 성장과 발달, 행복하고 건강한 삶에 필요한 안전하고 영양가 있는 식품에 접근하기 어려운 상태를 말한다. 식량 불안정은 물가 상승, 기후 변화, 전쟁 등 다양한 요인으로 발생하는데, 저개발국, 개발도상국은 물론 선진국에서도 많은 사람이 경험하고 있다.

연구팀은 2022년 9월부터 2023년 8월까지 1년 동안 영국과 프랑스의 성인남녀 약 500명을 대상으로 주 단위로 식습관, 음식 수급 상황과 정신 건강 상태를 측정해 비교했다. 정신 건강은 불안증과 우울증을 측정할 때 사용하는 GAD-7, PHQ-8 지표로 평가했다.

연구 결과, 조사 대상의 39.5 %가 연구 기간에 식량 불안정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식량 불안정성이 불안과 우울 증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식량 불안정을 경험할 때는 정신 건강이 악화하고, 식량 안정이 개선될 때는 정신 건강이 향상된 것으로 조사됐다.

식량 불안정은 불안과 우울의 직접적 원인이 된다는 분석이 나왔다. 식량 불안정은 저소득국가뿐만 아니라 기후 변화로 인해 선진국에서도 일상화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사진은 1845~1852년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대기근 때문에 10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수도 더블린에 조성된 대기근 조각상. ⓒShutterstock

연구를 이끈 대니얼 네틀 영국 노섬브리아대 교수(사회인지)는 “현재 식량 불안정을 제거하면 임상적으로 우려되는 불안과 우울증 증상의 유병률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다”라며 “기후 변화로 인해 식량 불안정이 확대될 가능성이 커지는 만큼, 정부나 지역사회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정책을 내놓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조언했다.

‘가난은 나라님도 못 돕는다’라는 옛말이 있다. 과학기술과 보건의료 기술이 발전하지 않고, 충분한 국가의 부가 축적되지 않았을 때는 맞는 말이다. 선진국 반열에 들어선 요즘에도 복지와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면 여전히 저런 구태의연한 말을 마치 경제학 원리처럼 내뱉는 사람들이 있다. 노동 가용 인력이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 저출생 시대에는 국가의 전체적 부와 평균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는 국가가 국민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최저선을 지켜주는 것이 맞다. 이번 두 연구를 수행한 과학자들도 “국가와 사회의 공중보건 전략이 단순히 개인의 생활 방식 처방을 넘어 구조적 불평등과 거버넌스 결함을 해결하도록 확장되어야 한다”라고 강조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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