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연구원의 새로운 기준입니다.
글
김신회 작가
재택근무를 하는 프리랜서로 이십 년 가까이 살아왔다.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없어 마치 ‘꿀 빠는 직업’ 같지만
스스로 일을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는 게 없다는 단점이 있다.
자신과의 약속이나 규칙, 루틴 없이는 육체 및 정신 건강을 망치기도 쉽다.
덕분에 내 삶은 프리랜서이면서도 전혀 프리하지 않다.
© 티캐스트
친구가 영화 한 편을 추천했다. 제목은 <퍼펙트 데이즈>. 2024년에 개봉해 별다른 홍보 없이도 14만 관객이 본 영화다. 영화는 도쿄에 사는 60대의 공중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의 이야기를 그린다. 낡은 목조 주택에서 혼자 사는 그는 새벽에 집 앞 자판기에서 뽑은 음료로 끼니를 대신하고, 올드팝이 흐르는 낡은 승합차를 몰고 일터로 출근한다. 그는 종일 공중화장실을 마치 자기 집 욕실처럼 깔끔하게 쓸고 닦는다. 한참이나 어린 동료가 농땡이를 부려도 묵묵히 화장실을 지킨다.
점심시간에는 작은 공원에서 점심을 먹으며 분재로 키울만한 식물들을 탐색한다. 퇴근 후에는 헌책방에 들러 문고본을 사와 읽는다. 휴일에는 대중목욕탕에 가 쌓인 피로를 벗겨내고, 허름한 단골 술집에서 늘 마시는 술을 한잔한다. 단출하기 그지없는 그의 일상 위에 절로 내 하루가 겹쳤다.

© 티캐스트
나는 매일 아침 8시면 잠에서 깬다. 개가 날 깨우기 때문이다. 우리 집 루틴 왕인 개는 매일 8시에 아침밥을 먹는데 그 덕에 나는 일정이 없는 날에도 8시면 눈을 떠야 한다.
개밥을 주고 씻고 나면 물 한 컵에 유산균제 한 알을 먹은 다음 아침상을 차린다. 아침밥을 직접 차려 먹을 수 있다는 것은 프리랜서가 누릴 수 있는 최대의 복지다. 제철 채소와 과일은 빼놓지 않고, 두부나 달걀로 단백질을 챙기고, 작업의 연료가 되어 줄 커피 한 잔에 빵까지. 오늘 하루 열심히 살 예정인(!) 나에게 스스로 밥상을 대접한다.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고 나면 업무에 임할 차례. 밀린 메일을 체크하고 원고를 쓰고, 수업이나 강연 준비를 한다. 늦은 오후쯤, 허리가 뻐근하다 싶으면 개와 산책할 시간. 동네를 한 시간쯤 걷다 돌아와서는 저녁상을 차린다. 저녁 메뉴는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로 간단하게 만든다. 밥을 먹고 나면 남은 하루는 휴식 시간.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다가 소화가 되었을 즈음 방에 매트를 깔고 ‘홈트’를 한다. 그리고는 슬슬 잘 준비를 한다.
영화 속 히라야마 씨가 그러듯 쳇바퀴 같은 하루를 매일 반복하는 게 내 일상이다. 어렸을 때 꿈꿔온 중년의 삶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어느새 반복되는 하루를 편안해하는 어른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일 년을 살다 보면 책 한 권 분량의 원고가 쌓이고, 매일 제철 음식을 챙기고 산책을 거르지 않음으로써 사계절을 살뜰히 즐기게 된다.
영화를 권한 친구는 말했다. “어릴 때는 나이 든 내 모습을 그저 남 일처럼, 환상적으로만 그렸던 것 같아. 나만큼은 화려하고 특별한 삶을 살 줄 알았지. 그런데 정작 지금 내 삶은 평범 그 자체야. 그런데 영화를 보니까 내 노년이 저런 모습이어도 괜찮겠더라. 하루하루 묵묵히, 꾸준히 살아가는 게 결국 최고의 인생 아닐까.”
관객들 역시 비슷한 이유로 이 영화에 빠져들지 않았을지. 초대형 블록버스터도 관객을 모으기 힘든 시대에 14만 명이 공명한 영화라니. 영화는 특별함보다 힘이 센 것은 꾸준함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뭐든 빠르게 움직이는 시대다. 성공도 빨리하고 싶고, 큰돈도 빨리 벌고 싶고, 재빠르게 성취한 것들을 그때그때 소셜미디어에 전시하는 것도 손쉬운 요즘이다. 오 분 남짓 이어지는 영상을 볼 지구력마저 없는 사람들은 ‘쇼츠’라는 유행까지 만들어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꾸준히, 천천히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 그렇게 사는 건 무척 어렵다는 것. 그래서 느린 것은 볼품없다고 치부한 채 빨리 결론 나는 것들에만 몰두하는지도 모른다.
아끼는 동네 서점의 SNS에는 매일 출퇴근 사진이 올라온다. 하루 동안 어떤 책을 팔았는지도 꼼꼼하게 공개한다. 한 장 한 장 구경하면서 큰 위로를 받는다. 오늘도 가게 문을 열었네. 어느새 영업이 끝났네. 내일도 무사히 문을 열겠지. 특별할 것 없는 사진을 바라보면서 나 역시 게으름을 떨쳐내며 책상 앞에 앉는다.
꾸준함에는 멋이 없다. 자랑할 만한 화려함도 없다. 하지만 그 안에는 진짜 내 삶이 있다. 긴 시간 동안 내게 맞는 호흡과 속도, 걸음으로 일궈온 삶에는 자신감이 있다. 나이 들수록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의 뜻은 다른 데 있지 않다. 꾸준함은 누구보다 내 인생을 책임감 있게 살 수 있도록 돕는다.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정해진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았고 이 글 한 편을 썼다. 내일 하루도 비슷할 것이다.
김신회
작가. 1인 출판사 ‘여름사람’ 대표.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에세이 작품들로 많은 독자의 공감을 얻고 있다. 책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아무튼, 여름』, 『꾸준한 행복』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