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

마음의 짜릿함을

놓치지 마세요

전호준
내 안에 또 다른 나를 발견해서 놀란 적이 있나요? 저는 뮤지컬 배우입니다. 직업의 특성상 연기를 할 때 미처 몰랐던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연기도 합니다. 만약 장기 공연을 한다면 프로 운동선수 못지않은 체력도 필요합니다.
배우라는 직업에는 '오디션'이라는 과정이 필수입니다. 각 작품에서 원하는 배우상이 다 다르기 때문인데요. 그것에 맞춰 전략을 잘 짜야 합니다. 예를 들면 작품에 맞는 자유곡도 정해야 하고 공연 의상과 비슷한 느낌의 오디션 의상도 준비해야 하고 연기 톤도 살짝 조정해야 하고 작품에서 주어진 지정 안무도 소화해야 합니다.
7~8년 전 쯤, 제가 '위키드(Wicked)'라는 공연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어느 날 배우들이 극장 한 쪽에서 무엇인가를 보며 웅성거리고 있어 그쪽으로 갔더니 이런 말이 제 귀에 쏙쏙 들리더군요. "캬, 음악 죽인다!", "이 작품 너무 좋다!" 동료 배우들의 극찬과 놀라는 모습을 보고 저는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한 배우가 저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호준아, '킹키부츠(Kinky boots)'라는 뮤지컬이 있는데 한국에 곧 들어온대!"
저는 영상을 보고서는 놀라움에 동공이 확장되다 못해 펼쳐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온몸이 짜릿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여배우에게 제 시선이 꽂혔습니다. 그녀는 너무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무엇보다 연기를 너무 잘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배우는 남자였습니다. 여. 장. 남. 자. 전문용어로는 '드랙퀸(Drag queen)'이라고 하는데 극 중에선 '엔젤(Angels)'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더라고요.
저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고 그 역할이 너무 하고 싶어졌습니다. '엔젤 아니면 안 돼. 무조건 엔젤은 내가 한다!' 그렇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오디션을 보기로 했습니다. '뭘 준비해야 할까?' 생각해봤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건 '높은 힐, 화장과 가발, 여자' 그리고 '백 텀블링'. 제가 꽂혔던 그 역할이 극 중 넘버인 'Sex is in the heels'에서 15cm 힐을 신고 백 텀블링을 해야 하거든요. 네, 힐을 신고요.
저는 그 역할을 따내기 위해서 지난 10년의 배우 인생에 없었던 리듬체조 학원을 등록했습니다. 10살 전후의 아이들과 함께 다리도 찢고 백 텀블링에도 도전했죠. 준비하면서 즐겁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여행가방
'와, 내 인생에 없던 걸 여기서 다 하고 있네.'
샵에서 여장을 하고 가발도 썼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또 다른 존재가 된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변신한 모습으로 길거리를 걸었더니 사람들이 쳐다보더군요. 그 시선을 즐겼습니다. 오늘 하루는 드랙퀸으로 사는 거니까요.
택시를 타고 곧장 오디션장으로 향했습니다. 가슴 속에 한 배우의 배역을 따내겠다는 푸른 꿈과 포부를 안고. 택시기사님도 엄청나게 놀라셨는지 룸미러로 저를 계속 보더군요. 그런 시선이 은근히 즐거웠습니다.
오디션장에는 해외 연출가, 음악감독, 안무 감독 (해외 크리에이티브 팀)이 있었고 지정곡을 부르러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저는 허리를 완전히 꺾고 엉덩이를 내밀며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섹시하고 도발적인 포즈를 취하며 윙크를 날렸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해외 크리에이티브 팀은 "Hey, Sexy~"라고 부르며 제게 손 키스를 날렸습니다.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짜릿한 느낌! 그런 기분은 제 인생 처음이었습니다.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오디션장 한가운데에 섰습니다. 제가 준비한 엔젤의 모습으로 지정곡을 부르고 지정 안무를 선보였습니다. 오디션장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뜨겁다 못해 데일 정도였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보여줬어. 이제 후회 없어.' 저는 짜릿함과 뿌듯함을 동시에 안고 오디션장에서 나왔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합격 통보를 받았고 1년간의 연습을 거쳐 뮤지컬 킹키부츠의 엔젤 역으로 공연을 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드랙퀸의 역사부터 엔젤은 작품에서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제작진들과 끊임없이 얘기하며 공부했습니다. 저는 점점 엔젤에 진하게 스며들었고 어떤 시간보다 최고로 행복하고 짜릿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엔젤로 살았던 그때 제 속에 감춰져 있던 수많은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 영상을 보지 않았다면, 오디션에 도전하지 않았다면 과연 그런 저를 만날 수 있었을까요? 숨겨진 새로운 나를 만나고 싶다면 마음이 움직이는 짜릿한 순간을 절대 놓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