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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과 우주의 신비를 밝혀낼 수 있을까? 양성자 가속기

태초에는 원자보다 훨씬 작은 소립자들만이 존재했습니다. 빅뱅과 함께 쏟아져 나온 이들은 우주가 팽창하는 동안 서로 부딪치고 결합하며 첫 번째 원소인 수소를 탄생시켰죠. 이어서 헬륨, 리튬 등 무거운 원소들이 생성되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이르렀습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우주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과학자들은 138억 년 전 그 현장에 있던 소립자를 생성하고 연구할 수 있는 양성자 가속기에 주목했습니다.

모든 물질과 생명체는 무수히 많은 원자로 이뤄져 있습니다. 원자의 중심에는 무거운 원자핵이 있고, 그 주변을 -(마이너스) 전자들이 빠른 속도로 돌고 있죠. 이때 원자핵은 +(플러스) 전기의 양성자와 전기를 띠지 않는 중성자로 뭉쳐져 있습니다. 여기서 양성자만을 떼어내 빠른 속도를 내도록 만든 장치가 바로 ‘양성자 가속기’입니다.

양성자 가속기의 원리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우선 수소 원자에서 떼어낸 양성자를 두 개의 금속판 사이에 놓습니다. 각각의 판에 건전지의 +극과 –극을 연결하죠. 그리고 두 판에 전기를 흘려주면, 양성자는 +전기를 띠므로 건전지의 +극은 양성자를 밀어내고 –극은 당겨 양성자를 가속하게 됩니다. 1.5 V(볼트) 건전지를 이용하면 양성자를 1초당 17 km로 달리게 할 수 있는데, 이는 시속 100 km로 달리는 자동차보다 무려 600배 빠른 속도입니다.

그러나 실제 양성자 가속기는 건전지 몇 개보다 훨씬 더 높은 전압을 이용하는데요. 양성자가 얼마나 빠르게 달리느냐에 따라 다양한 첨단과학 연구가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우선, 건전지 670개를 연결한 것에 해당하는 1천 V의 전압을 가하면 양성자는 1초속 500 km까지 빨라집니다. 이는 서울에서 부산을 1초 만에 도달하는 속도인데요. 이때 양성자가 물질과 충돌하면, 그 물질의 표면에서 원자 또는 분자를 낱개씩 떼어낼 수 있습니다. 이는 물체 표면을 나노급으로 정밀하게 가공할 수 있어 반도체, 정밀기계 등에 활용되죠.

양성자를 초속 5,000 km로 가속하면 양성자가 물질 속까지 파고 들어갑니다. 양성자가 지나가고 멈춘 주변 물질의 성질은 크게 바뀌는데요. 손톱으로 긁히는 연한 플라스틱이 강철처럼 단단해지기도 하고, 전기가 통하지 않는 물질에 전기가 통하기도 합니다.

초속 5만 킬로미터의 양성자는 원자 주위를 돌고 있는 전자까지 뚫고 들어가 원자핵과 반응하여 새로운 원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암과 같은 병을 진단하거나 치료할 때 쓰이는 여러 동위원소 생산에 이용되죠.

초속 13만 킬로미터 이상이 되면 양성자는 무거운 원소의 원자핵을 깨뜨려 가벼운 원소의 원자핵과 양성자 그리고 중성자를 다량으로 생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빛의 속도인 초속 30만 킬로미터에 이르면 우주의 탄생과 진화 그리고 별의 생성과 소멸과정을 밝혀내는 열쇠, 소립자까지 만들어내죠.

이처럼 양성자가속기는 속도에 따라 각기 다른 현상이 나타나므로 나노, 반도체, 생명, 에너지·환경, 신소재 그리고 우주까지 그 활용 분야가 무궁무진합니다. 우리나라는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양성자가속기연구센터를 설립해 본체만 75m에 달하는 대용량 선형 양성자가속기를 가동하고 있는데요.

현재 한국원자력연구원 양성자과학연구단이 가동하고 있는 양성자가속기의 에너지는 최대 100 MeV(메가전자볼트), 다시 말해 1억 전자볼트에 달합니다. 연구원은 100 MeV급의 강력한 양성자빔 뿐만 아니라 keV(킬로전자볼트) 단위의 이온빔 시설도 함께 운영하고 있는데요. 이온빔은 양성자빔에 비해 에너지 세기는 상대적으로 작지만, 물질 표면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산업적 활용도가 뛰어납니다.

특히 최근 국내 반도체 산업계에서 양성자가속기 이용 수요가 더욱 늘어났습니다. 우주에서 날아오는 고에너지 방사선에 의해 반도체가 오작동하거나 망가지지는 않는지 양성자가속기를 이용해 미리 확인하고 대비해야만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안전하게 이용하고, 앞으로 양자컴퓨터, 미래 자동차, 6G 통신, 인공위성 등 차세대 기술들의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연구원은 양성자가속기의 성능을 꾸준히 개선해나갈 계획입니다.

지난 20세기 과학자들이 원자를 발견하고 이용했다면, 21세기에는 그보다 더 작은 양성자와 전자, 중성자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주 비밀을 푸는 데에 그치지 않고, 미래 과학기술 준비에 앞장서는 연구시설. 앞으로 양성자가속기가 펼칠 가속과 충돌의 마법이 더욱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