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사람이나 동물이 경험한 것을 특정 형태로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재생하거나 재구성하는 현상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마들렌 냄새라는 특정 자극을 통해 오래전 겪었던 일을 떠올릴 수 있는 것도 ‘기억’이란 메커니즘 덕분이다. 그런데 간혹 새로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사물이나 사람의 이름을 기억할 수 없고, 과거 경험이 점점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상태를 겪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바로 ‘기억 장애’ 때문이다.
기억 장애는 치매, 혈관질환, 신경세포 감소, 외상 등으로 나타난다. 이 중 신경세포 감소나 치매 현상은 나이가 들면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치매 원인 가운데 70 % 이상을 차지하는 것은 알츠하이머이다. 알츠하이머는 뇌에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이나 타우 단백질이 쌓이면서 독성을 만들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밖에도 여러 요인들이 관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정확한 발병 원인과 메커니즘이 밝혀지지 않아 예방이나 치료도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콜롬비아, 미국, 독일 3개국 공동 연구팀은 알츠하이머를 예방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유전적 변이를 새로 발견했다고 5월 17일에 밝혔다. 이번 연구에는 콜롬비아 안티오퀴아대 의대, 미국 하버드대 의대 안과학연구소, 매사추세츠 종합병원, LA아동병원, 캘리포니아 산타바바라대(UCSB), 서던캘리포니아대 의대, 브리검 여성병원, 애리조나주립대, 애리조나대, 피닉스 응용유전체학연구소, 독일 함부르크-에펜도르프 대학병원 소속 생물학자, 의학자, 뇌과학자들이 참여했다. 이 연구 결과는 의학 분야 국제학술지 ‘네이처 메디슨’ 5월 16일 자에 실렸다.
연구팀은 파이사 돌연변이라고 불리는 ‘프레세닐린-1-E280A’ 변이유전자를 가진 유전성 알츠하이머(상염색체 우성 알츠하이머, ADAD)가 유전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가족 구성원을 분석했다. ADAD는 콜롬비아의 특정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이사 돌연변이를 가진 사람은 평균 44세에 경도 인지 장애가 발생하고 49세에 알츠하이머 치매가 시작돼 60대에는 치매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연구팀은 파이사 돌연변이를 가진 대가족의 정밀 뇌신경영상 촬영, 유전자 검사 등을 거쳐 ‘대규모 콜롬비아-보스턴 바이오마커(COLBOS)’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연구팀은 이후 지난 30년 동안 이 대가족을 추적 조사해 왔는데 2019년에 70대까지 알츠하이머를 겪지 않은 여성 환자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이번에도 파이사 돌연변이를 가지고 있음에도 67세까지 인지능력이 온전한 상태를 유지했다가 72세에 경증 치매가 시작돼 74세에 사망한 남성을 추가로 발견한 것이다.
2019년에 발견된 여성이 알츠하이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APOE3 단백질에 영향을 미치는 파이사 돌연변이를 가졌음에도 알츠하이머가 걸리지 않은 이유는 희귀한 ‘크라이스트처치 유전자 변이’ 2개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발견된 남성은 크라이스트처치 유전자 변이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변이체를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팀은 이번에 발견된 새로운 알츠하이머 차단 물질을 ‘릴린-콜보스 변이체’라 이름 붙였다. 실제로 생쥐와 인간 세포 실험을 통해 릴린-콜보스 변이체가 알츠하이머 진행을 차단하는 것으로 확인했다.
이 남성의 경우 지금까지 알츠하이머 유발 핵심 원인으로 알려진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 수치가 높고 뇌 일부에는 타우 단백질이 엉켜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기억과 학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진 ‘내후각피질(entorhinal cortex)’이라는 부위에는 타우 단백질 엉킴이 거의 없었다. 연구팀이 발견한 릴린-콜보스 변이체도 바로 내후각피질 부위에서 찾아낸 것이다.
과학자들은 릴린 단백질이 APOE 단백질과 ‘동전의 양면’이자 ‘사촌’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릴린과 APOE는 모두 비슷한 세포 수용체의 똑같은 위치에 결합하기 위해 경쟁하는 단백질이라는 것이다. 릴린이 자리를 먼저 차지하게 되면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에서 나타나는 타우 단백질의 엉킴을 줄이게 되고, APOE 단백질이 먼저 결합하면 타우 단백질의 엉킴 현상은 심해져 중증 알츠하이머가 발생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릴린 단백질은 뇌세포 발달과 기능 조절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릴린의 돌연변이에 따라 자폐증, 뇌전증, 양극성 장애, 조현병 같은 질병 발병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들이 있었다. 이번에 발견된 릴린-콜보스 변이체는 뇌기능을 저하하는 물질로부터 뇌를 보호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팀은 밝혔다.
연구팀은 유전자 변이를 포함한 다른 요인이 알츠하이머 증상 발생을 억제하고 환자의 뇌신경 회복력에 기여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연구팀은 동물과 세포를 통한 전임상 연구를 통해 릴린-콜보스 변이가 알츠하이머 증상 진행을 억제하는 핵심 요인으로 보고 있다.
연구를 이끈 조셉 알볼레다 벨라스케즈 미국 하버드대 의대 교수는 “전 세계적으로 고령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알츠하이머는 사회적으로 가장 부담을 주는 파괴적 질병”이라며 “이번 연구로 밝혀진 자가 회복 메커니즘은 알츠하이머 예방과 치료에 효과적인 전략을 세우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벨라스케즈 교수는 “이번 연구는 질병의 진행을 지연시키고 멈추기 위해 뇌의 어느 부위를 살펴봐야 하는지 지침을 제시한 것이며 알츠하이머 치매 진행 메커니즘에 대한 새로운 가설을 만들 수 있게 해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