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우연일까? 하필 어버이날을 맞이해 노년층의 출입을 제한하는 ‘노시니어존(No Senior Zone)’ 카페가 등장해 논란을 빚고 있다. ‘60세 이상 어르신 출입 제한’이란 친절한 설명까지 붙여 놓았는가 하면, 한쪽에는 ‘안내견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어 개만도 못한 노인 차별이라며 논란은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노시니어존의 등장을 한 카페 사장의 돌출 행동으로 치부하기 이전에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심각한 노인 차별과 혐오 그리고 세대 간의 분리 및 단절을 가시적으로 드러낸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언제부터 ‘나이’가 우리 사회의 차별을 생산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어온 것일까. 지난해 20대 대선과정에서도 세대 갈라치기가 중요한 득표 전략의 하나가 될 만큼 최근 우리 정치는 세대 통합이 아니라 세대 갈라치기를 통한 정치적 이익을 공공연히 도모하고 있다.
사실 노시니어존 이전에도 ‘아이를 동반하고 입장할 수 없는 공간’을 의미하는 노키즈존(No Kids Zone) 카페나 음식점 그리고 비행기의 좌석이 존재해 왔다. 아이들의 과잉행동이나 소음을 막기 위한 조치로 출입금지를 하고 있는 노키즈존에 대해서도 찬반 논쟁이 있었지만 노키즈존은 확산 일로에 있다.
어쩌면 우리나라가 합계출생률 0.78(2023.02 기준)의 저출생 사회가 된 것은 단순히 젊은이들의 낮은 결혼율과 취업률 그리고 높은 집값 등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어린이를 동반하고는 마음 놓고 카페도 음식점도 출입할 수 없고, 소아과가 문을 닫아 아이가 병원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사회라면 어찌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싶겠는가? 노키즈존이 말해주듯이 사회적으로 어린이를 성인들의 쾌적한 향유권을 방해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가치관이 널리 퍼져 있는 한 인구절벽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에 대항이라도 하듯 어린이 동반 전용의 키즈카페가 등장했듯이 머지않아 노인 전용의 시니어카페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카페가 생긴다고 하더라도 돈이 없는 노인들은 탑골공원의 무료급식소로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공공장소에서의 예절을 가르치지 않고 아이들을 방치하는 부모들이 일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린이들이 다른 손님들의 쾌적하게 즐길 수 있는 권리를 침해하고 영업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노키즈존을 운영하는 업주들의 논리이다.
그런데 노시니어존을 내건 업주는 시니어들이 어떤 통제할 수 없는 행동으로 다른 손님들의 향유권을 방해하기에 시민으로서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출입금지의 노시니어존을 만들었는지 묻고 싶다. 업주가 어떤 진상의 시니어를 만나 영업을 방해받는 경험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일탈일 뿐이다.
그 일탈행동을 통제해야지 그것을 전체 시니어의 문제로 간주하여 출입금지를 선언했다면 그것은 모기 한 마리 잡자고 칼을 휘두른 격이다.
유흥업소에 미성년자 출입 제한이 적용되거나 영화나 드라마의 15세 관람가나 19세 이상 관람가와 같은 등급은 청소년 보호라는 명분과 논리를 나름대로 지니고 있다. 하지만 노시니어존에서는 시니어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찾아볼 수 없고, 그야말로 노인에 대한 혐오와 차별과 배제만이 감지될 뿐이다.
노키즈존에 이어 노시니어존의 등장은 우리 사회가 어린이도 노인도 배제한 청중년층 중심의 사회가 된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물론 우리 사회의 핵심적 세대로서 왕성하게 노동활동을 하는 중간 세대의 중요성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아직 돈을 벌지 못하는 어린이와 은퇴한 노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를 배제한 중간 세대만이 사회의 핵심적 구성원이라는 듯이 최근 우리 사회는 심각한 연령주의(연령차별주의)에 빠져들고 있다. 부의 양극화와 젠더 차별도 심각한데, 어느새 연령까지 양극화된 사회로 치닫고 있다니······.
과거 농경사회에서 노인은 인생을 먼저 산 사람으로서 삶의 지혜를 구할 수 있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산업사회 이후 노인은 급격한 산업기술의 발달로 노동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경제력을 상실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특히 정년제를 통해 더 이상 경제활동을 할 수 없도록 사회적 사망선고를 내림으로써 노인을 사회경제적 약자에다 가정적으로도 쓸모없는 무능력자로 만들어버렸다. 노인은 세상 물정 모르고 고루한 자신의 주장만을 완고하게 고집하는 꼰대이자 정치적으로는 보수꼴통이요, 자식들에게 부담을 안겨주는 골칫덩어리이자 초고령 사회의 사회경제적 부담을 떠안기는 짐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 인식이 노시니어존에 반영된 것 같아 시니어들의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헌법 1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어린이든 노인이든 중간 세대든 모두 우리 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이고, 차별받지 않는 기본권을 향유할 주체들이다. 따라서 연령으로 세대를 가르고, 출입할 공간마저 통제하며 차별할 것이 아니라 모두가 우리 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공존의 주체라는 의식을 확립하여 상대방의 권리를 존중하고 배려하려는 노력이 더욱 요청된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이자 작가인 장 아메리(Jean Améry)는 『늙어감에 대하여』에서 “빠르든 늦든 누구나 언젠가는 ‘더는 알 수 없는 세상’이라고 한탄할 문턱에 이르기 마련이다”라고 했다. 누구나 태어나서 죽는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필연이다. 즉 누구에게도 노년은 닥쳐오는 거부할 수 없는 미래이다. 따라서 노인을 배제하며 사회적 혐오의 대상이자 낙인처럼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
미국의 임상심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메리 파이퍼(Mary Pipher)는 현대사회에서 노년의 세계는 ‘또 다른 나라’라고 했다. 모든 것이 젊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노인들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또 다른 나라’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또 다른 나라의 가난, 질병, 죽음, 고독과 무기력 속에서 살아가는 소외된 타자(他者)가 아니라 파이퍼가 『나는 내 나이가 참 좋다』에서 나이 들어가며 발견할 수 있는 기쁨과 희열을 생생하게 그려냈듯이, 시니어들도 노년만의 기쁨과 희열을 스스로 발견하는 주체로 즐겁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도 그것을 응원해야 한다. 그것이 백세시대를 맞은 개인과 사회가 지향할 진정한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