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의 발전은 그동안 과학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됐던 인문학, 사회과학 심지어 예체능 분야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학기술과 융합 연구는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던 것들이나 풀지 못했던 문제를 손쉽게 풀어내기도 한다. 과학기술의 가장 큰 혜택을 받고 있는 분야는 다름 아닌 고고학 분야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고고학’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여전히 페도라 모자를 쓰고 크로스백을 맨 채 먼지를 뒤집어쓴 영화 속 ‘인디아나 존스’ 박사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사실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고고학자들은 인디아나 존스처럼 흙투성이가 된 채 유적지를 뛰어다니며 유물을 찾는 현장 작업자의 모습과 같았다. 그동안 고고학자의 상상력과 지식에만 의존해 과거를 복원했다면 이제는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 자연과학은 물론 기계공학, 전기전자공학, 항공공학, 인공지능 등 다양한 공학기술의 힘을 빌려 상상력의 빈자리를 채워 실제에 가깝게 복원해내고 있다.
예를 들자면 화학 고고학(고고화학)은 동위원소 분석, 유기물·무기물·화합물 분석을 통해 유적의 진위 판별은 물론 기술 발전, 인간 활동, 식생활, 거주환경 등을 밝혀낸다. 생물 고고학은 생물학적 인류학, 사회학, 고고학을 결합해 발굴된 유골이나 유물의 DNA를 분석해 혈연과 민족 간 연관관계, 과거 인류가 살았던 환경과 자원에 대한 접근, 병원체나 기후에 따른 삶과 죽음의 변화, 집단이나 문화의 이동 경로를 규명한다. 인공위성, 항공기에 탑재된 레이저 관측 장비로 땅속에 묻혀 있는 고대도시를 찾아내는가 하면 수백만 건의 고문서를 빅데이터로 바꿔 인공지능(AI)으로 과거 모습을 사진처럼 복원하기도 한다.
2021년 이집트 카이로의대 연구팀은 이집트 정부 유물부와 함께 컴퓨터 단층촬영(CT) 기술로 기원전 16세기 이집트 신 왕국 시대를 여는 데 기여했던 파라오의 사망 원인을 밝혀내고 의과학 분야 국제학술지 ‘첨단 의학-병리학’에 발표했다. 이집트 신 왕국 시대를 연 것으로 평가받는 제17왕조의 ‘용맹왕’ 세켄네라 2세(재위 기원전 1560~1558년) 미라는 1880년대 처음 발견됐는데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정확한 사망 원인을 찾으려는 노력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연구팀의 CT 분석에 따르면 세켄레라 2세는 사망 당시 나이는 40세 전후였으며 손이 뒤로 묶인 상태에서 여러 명의 사형 집행자에게 공개 처형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고고학자들은 세켄네라 2세는 전장의 최전선에서 적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얼마 전에는 고고학과 진화인류학 분야에서 선도적 연구를 하는 미국 필드 자연사 박물관과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 연구소 연구진이 과학적 방법을 통해 인류의 도구 사용 역사와 고고학의 수수께끼 한 고리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미국 시카고 필드 자연사 박물관, 일리노이대, 노스캐롤라이나대 공동연구팀은 레이저 기술과 화합물 분석을 통해 7~11세기 남미 안데스산맥 일대에 있었던 대제국 ‘와리’시대에 도자기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확산 됐는지를 고고학 분야 국제학술지 ‘고고과학 저널’ 3월 15일 자에 발표했다.
현재 페루 지역에 존재했던 ‘와리’는 7~13세기에 안데스산맥과 해안을 따라 약 1,600 km 이상 뻗어나간 고대 대제국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팀은 페루 전역에서 발굴한 와리 제국시대 건물터와 무덤 등에서 발굴된 도자기 유적 일부를 레이저로 미세하게 긁어낸 다음 가루를 질량 분석해 도자기의 화학 성분을 조사했다. 이를 통해 거대한 고대 제국에서 도자기를 수도에서 지역으로 내려 보냈는지 도자기 제조 방식만 알려주고 지역별로 생산했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그 결과 도자기의 형태는 제국 전체가 유사했지만, 성분은 모두 다른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를 총괄한 패트릭 라이언 윌리엄스 일리노이대 교수는 “이번 연구를 통해 고대 로마는 제국 전역이 공통적인 로마 스타일을 사용하도록 지중해 전역에 도자기를 운송하는 방식이었다면, 와리 제국은 형태와 스타일만 알려주고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드는 방식을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윌리엄스 교수는 “도자기 분석을 통해 와리 제국이 고대에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번영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있다”며 “거대 제국에서는 지역별 자치권과 자율성을 인정해주는 방식이 아니었다면 운영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영장류 연구그룹, 미국 조지워싱턴대 인류고생물학 고등연구소, 태국 쭐랄롱꼰대 생물학과 공동연구팀은 초창기 인류와 원숭이들이 만든 석기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런 연구 결과는 기초과학 및 공학 분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즈’ 3월 11일 자에 실렸다. 연구팀은 태국 팡아만 국립공원에 있는 긴꼬리원숭이들이 딱딱한 견과류나 과일 껍질, 조개류 등을 먹을 때 사용하는 돌 도구를 수집해 고인류의 석기와 비교했다. 그 결과 긴꼬리원숭이들이 사용한 석기의 형태는 놀라울 정도로 구석기 시대 인류가 사용했던 석기들과 유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팀은 이를 통해 구석기 시대의 석기로 알려진 것들의 역사가 훨씬 더 오래됐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이끈 토모스 프로피트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 박사(구석기 고고학)는 “이번 연구 결과는 인류 최초의 석기 기술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며 “인류의 진화뿐만 아니라 인간 도구 사용의 기원과 진화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