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

고장난

혼인·출산 시계

 
‘성공해야 저 여자가 내 여자다.’
‘공부하면 미래 남편의 얼굴이 바뀐다.’
한때 인터넷에 유행하던 재미있는 급훈들이 새삼 떠오른 것은 작년 출생아 수가 24만여 명으로 사상 최저였고, 결혼 건수도 마찬가지였다는 뉴스를 보고서다. 사실 나도 공부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성공해서 예쁜 여자 만나는 거라고 여기던 때가 있었다. 멋진 여자와 사랑하고 결혼해 함께 사는 것을 꿈꾸며 보냈던 젊은 날이었다.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우리 사회에서 결혼과 출산이라는 단어는 행복과 기쁨이라는 이미지가 퇴색하고 있다.
지난 정부의 대통령 소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우리의 현실을 답답하고 암울한 4대 지옥으로 표현했다. 직장도 돈도 없는데 무슨 결혼이냐는 ‘결혼 지옥’, 낳아봤자 헬조선의 노예로 떨어진다는 ‘출산 지옥’, 직장맘 울리는 독박육아라는 ‘육아 지옥’, 비혼과 한 부모자녀에게는 혜택이 없는 ‘차별 지옥’이라고 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TV에서 ‘미우새(미운 우리 새끼)’와 ‘나혼산(나 혼자 산다)’이란 프로그램이 몇 년째 인기이다. 서울에 사는 30대 남녀는 미혼자가 절반을 넘는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서울이 이처럼 거대한 미혼도시가 된 데는 비싼 집값과 사교육비, 양육의 어려움 때문이라고 한다. 고된 시집살이와 독박 육아에 지친 60대는 자녀들에게 “고생해 사느니 아예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라”고 권하기도 한다. 직장 여성들에게 “일 할래, 아기 키울래”라고 물으면 일하겠다는 답변이 압도적이다. 일과 가정이 양립되지 않는 풍토에서 결혼은 미친 짓이고 아기 낳기는 사치라고 한다.
나는 학교에서 새 학기 강의 첫 시간에 과목 내용과 상관없이 인구 문제부터 꺼낸다. 인구 통계를 아는 것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단초가 된다. “작년에 40만 명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작년 태어난 아기들이 초등학교에 가는 2029년에는 입학생이 고작 22만여 명에 그칩니다. 초등학교에서 시작한 인구 붕괴는 차츰 전 사회로 퍼져나갈 것입니다.”
심각한 미래 전망에 한 학생이 “그건 알겠는데요. 우리가 왜 결혼해야 하나요, 아기는 꼭 낳아야만 해요?”라고 툭 질문을 던진다.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사실 결혼과 출산은 인생의 필수 과정이라 여겨왔기에 “왜”라는 질문조차 새삼 던질 이유가 없었다. 고도성장 시대를 살면서 일자리나 집 마련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었다. 하지만 요즘의 젊은이들은 졸업과 함께 취업 걱정부터 하고, 취업해도 비싼 집값에 넌더리를 친다. 금수저가 아니라면 전셋집조차 얻기 벅차다. 직장이 서울이어도 집값 비싼 서울에서 신혼집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
지금 분명한 것은 우리의 결혼, 출산 시계가 고장났다는 사실이다. 유엔 인구 통계를 보면 명확하다. 인구가 우리나라와 비슷한 5천만 명대인 나라는 5개국으로, 평균 출생아는 94만 명이다. 우리보다 3배 넘는 아기를 낳고 있다. 우리처럼 20만여 명을 낳는 나라는 고작 14개국으로 총 인구가 대략 1천만명대 수준의 국가들이다. 인구 소국을 탈출하려고 아이 낳기에 애쓰는 나라들이다. 우리는 인구 수가 세계 28위이지만, 출생아 수만 따지면 75위에 그친다. 인구 규모에 비해 너무 적게 낳아 출산을 아예 포기한 나라처럼 여겨진다.
말을 물가로 데려갈 수는 있지만 강제로 물을 먹일 수는 없듯이 무조건 아기를 낳으라고 강요하면 누가 낳을 것인가. 그동안 아동수당, 양육수당 등 외국에서 효험을 봤다는 ‘헬리콥터 돈 뿌리기’식의 여러 저출산 대책을 써봤다.
하지만 돈 몇 푼에 아기 낳기를 결정할 신혼부부들은 없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출산을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안 된다. 우리와 달리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출산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기를 키울 여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낳는다.
프랑스는 출산율을 끌어올린 대표적인 나라이다. 내가 프랑스에서 만난 사람들은 “왜 아기를 두서넛씩 낳느냐”고 물으면 “수당이 많아서”라고 답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한결같이 “주변에서 아기를 낳으니까 아이 낳는 걸 당연하게 여겨요”라고 했다.
결혼하고 아기 낳는 것은 이처럼 분위기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아기 낳기를 비용 대비 지출이라는 경제성을 따져 효용성이 떨어지는 투자라고 분위기를 몰아가는데 누가 감히 걱정없이 아기를 낳으려 하겠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부터 결혼과 출산의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야 주어야 한다. 아기를 돌볼 사람이 없어 쩔쩔 매는 현실에서 어떻게 직장 다니며 자녀를 키울 수 있겠는가. 아이가 아파 반나절만 휴가를 내려고 해도 직장 상사의 눈총을 받는 게 현실이다. 승진 시기에 육아휴직을 가면 승진을 포기해야 한다.
외국 기업들처럼 유연근무제를 도입해 출퇴근시간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남성도 육아휴직을 자유스럽게 사용해 여성을 독박 육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그러려면 육아휴직 수당을 월급 수준으로 올리도록 정책을 세우는 게 정부의 첫 걸음이 되어야 한다.
저출산 극복 정책은 정부가 기업과 함께 나서지 않으면 효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래야만 아기를 낳지 않는 방식으로 ‘집단 자살’하려는 유일한 국가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