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병합 이전의 조선이 그랬던 것처럼 식민지 조선인들은 총독부의 폭력적 통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919년 3월의 거국적 움직임은 꽤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조선인들의 저항의식이 한 번에 폭발한 사건이었다. 국내는 물론이고 서간도, 북간도, 연해주, 상해, 일본 그리고 미국까지 지역을 막론하고 독립을 염원하는 이들이 점점 뭉치기 시작했다.
때마침 세계정세도 변화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로 열강 간의 세력 관계가 재조정된 것이다. 패전한 제국들은 무너졌고 수많은 국가가 독립해 새로 탄생하면서 민족주의가 고조됐다. 그렇게 상하이의 신한청년당, 미국의 대한인국민회 등은 1차 세계대전 종전을 마무리하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단을 파견하기 위해 힘썼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활동하던 이들은 1918년 12월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했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일본 유학생 단체는 1919년 2월 8일 ‘2·8독립선언’을 발표했다.
해외에서 물밀 듯 넘쳐흘렀던 독립에 대한 열망은 곧 국내에도 들이닥쳤다. 그렇게 1918년 말부터 천도교와 기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후 1919년 2월 18일 독립선언서와 일본 정부에 보낼 독립통고서가 작성되었고 2월 27일에는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각 종교의 교단 조직을 통해 배포됐다. “우리는 독립을 원한다”는 조선인들의 목소리가 전국에서 울려 퍼질 준비를 끝냈다.
3·1운동이 시작되었고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전국적으로 저항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시에서 농촌으로 퍼져나가며 참여 인원은 늘었고 다양한 계층이 함께하는 그야말로 전 민족적인 저항으로 거듭났다. 운동은 비폭력 시위에서 적극적인 폭력투쟁으로 발전했고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