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

‘분노’가 ‘혁명’이 된 독립운동,

3·1운동

 

조선은 망한 것이 아니라 빼앗긴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500여 년을 이어왔던 조선왕조는 대한제국을 거친 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본에 강제 병합된 대한제국은 조선으로 불리며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된 것이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이날의 치욕을 결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일본 제국주의를 향한 저항은 이미 치욕의 그날 이전부터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이 을사조약을 체결했을 때 조선인들은 깨달았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한다”는 강력한 시그널을. 그렇게 을사의병을 거병했다. 그리고 곧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의병을 초토화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07년 7월 20일 고종이 퇴위하고 나흘 뒤, 이른바 ‘정미 7조약’이라고 불리는 제3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었고 일본인 차관에 의한 내정 간섭이 시작됐다.
조선통감부는 이전보다 더욱 잔혹하게 이들을 탄압했다. 1909년 10월, 한일강제병합 직전 두 달 남짓의 시간동안 일본군의 의병 소탕 작전이 펼쳐진 것이다. 군사력의 차이를 확인한 조선인 의병 대부분은 이때 만주로 이동했다. 그렇게 대한제국은 통렬한 저항 끝에 1910년 일본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무소불위의 총독이 들어서다

대한제국이 강제로 병합되자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식민지 중앙기구였던 조선총독부는 1914년이 되자 지방행정구역을 통·폐합해 전국을 13도로 구분하고, 도 아래 부·군·면을 두며 식민정책이 유기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행정체계를 구축했다.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조선의 1대 총독은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그는 조선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살해당하고 얼마 뒤 부임된 조선의 마지막 통감이자 최초의 총독이었다. 그는 총독이 됨과 동시에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암살 위협을 받았다. 이렇듯 조선에서 총독이 된다는 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싸움이었다.
바로 이때 데라우치가 선택한 통치방식이 있다. 우리는 흔히 이를 ‘무단통치’라 부른다. 3·1운동이라는 전 민족적 저항이 일어나기 전까지 데라우치에 의해서 시행된 강압적인 통치를 일컫는다. 조선총독부는 헌병을 통해 치안을 유지하고, 언론·출판·집회 결사의 자유를 모두 박탈했다. 특히 헌병경찰제도는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 헌병이 일선 경찰의 업무를 맡도록 한 제도다. 일상적인 상황을 언제나 전시상황으로 간주해 군인에 의한 치안 유지를 도모했던 일종의 공포정치였다.

1919년 3월 한 달, 그 거국적 저항

강제병합 이전의 조선이 그랬던 것처럼 식민지 조선인들은 총독부의 폭력적 통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1919년 3월의 거국적 움직임은 꽤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조선인들의 저항의식이 한 번에 폭발한 사건이었다. 국내는 물론이고 서간도, 북간도, 연해주, 상해, 일본 그리고 미국까지 지역을 막론하고 독립을 염원하는 이들이 점점 뭉치기 시작했다.
때마침 세계정세도 변화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로 열강 간의 세력 관계가 재조정된 것이다. 패전한 제국들은 무너졌고 수많은 국가가 독립해 새로 탄생하면서 민족주의가 고조됐다. 그렇게 상하이의 신한청년당, 미국의 대한인국민회 등은 1차 세계대전 종전을 마무리하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단을 파견하기 위해 힘썼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활동하던 이들은 1918년 12월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했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일본 유학생 단체는 1919년 2월 8일 ‘2·8독립선언’을 발표했다.
해외에서 물밀 듯 넘쳐흘렀던 독립에 대한 열망은 곧 국내에도 들이닥쳤다. 그렇게 1918년 말부터 천도교와 기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후 1919년 2월 18일 독립선언서와 일본 정부에 보낼 독립통고서가 작성되었고 2월 27일에는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각 종교의 교단 조직을 통해 배포됐다. “우리는 독립을 원한다”는 조선인들의 목소리가 전국에서 울려 퍼질 준비를 끝냈다.
3·1운동이 시작되었고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전국적으로 저항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시에서 농촌으로 퍼져나가며 참여 인원은 늘었고 다양한 계층이 함께하는 그야말로 전 민족적인 저항으로 거듭났다. 운동은 비폭력 시위에서 적극적인 폭력투쟁으로 발전했고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파도가 지나간 뒤

3·1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한 최대 규모 항일운동이었고 독립운동사의 커다란 분수령이었다.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준 사건이었으며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하고 더욱 활성화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조선인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스스로 민족의식을 만들어 갔으며 더불어 정치의식까지 함께 높였다. 결과적으로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