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금속활자,

발명은 빨랐지만 혁명은 없었다

지난 호에서 밝혔듯 세종은 1434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활자 갑인자를 개발했다.
구텐베르크가 서양에서 금속활자로 42줄 성서를 찍어낸 것이 1454년 무렵이었다.
어째서 뒤늦게 금속활자 개발에 뛰어든 서양에서는 활자 혁명이 일어났고, 조선은 정체기를 겪게 되었을까.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구텐베르크 성서

1239년 혹은 1377년?

금속활자 발명국은 고려다.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에는 “1234~1241년 사이 <고금상정예문> 28부를 금속활자로 찍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금상정예문>은 기록으로만 존재한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어떨까.
책의 발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을… 주자본(금속활자본)으로 판각한다.”(1239년, 기해년) 그러나 이 책은 지금까지 목판본만 전해왔다고 알려졌다. 최근 들어 공인박물관이 소장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이 목판본이 아니라 금속활자본이라는 연구 성과가 발표됐다. 이 견해가 맞는다면 1239년 간행된 <남명증도가>가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1377년(공민왕 13년)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직지심체요절>이 있다. 이 <직지심체요절>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데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고려의 금속활자 기술을 이어받은 조선의 왕들은 태종부터 세종까지 계미자(1403년), 정해자(1407년), 경자자(1420년)에 이어, 활자의 백미라는 갑인자(1434년)를 개발하느라 고군분투했다.
한글창제 연간인 15세기에만 쓰인 표기법

<동국정운>에 사용된 활자

남명천화상송증도가

뒤늦게 출발한 구텐베르크지만

그렇다면 고려의 금속활자보다 215~77년 정도 뒤늦게 출발한 구텐베르크는 어떠했을까. 구텐베르크의 행적은 15세기 초까지도 모호하다. 동년배인 조선의 세종이 ‘갑인자’ 20만 자를 주조한 그 해(1434년) 비로소 구텐베르크의 흔적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 행적도 구텐베르크와 동업자들 간 법정다툼을 기록한 소송문을 통해 추정할 뿐이다. 소송문에는 후대의 인쇄 용어인 ‘프레스(Press·인쇄기)’와 ‘폼(Form·거푸집)’ 등과 함께 포도주 그리고 구텐베르크가 한창 진행 중이라는 ‘비밀기술’, ‘모험과 기술’ 등의 용어가 암호처럼 등장한다. 구텐베르크는 이 무렵부터 비밀리에 인쇄술을 연구한 것일까.
어떻든 1430년대까지도 구텐베르크는 인쇄술에 걸음마를 막 떼었거나 아직 떼지도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금속활자술을 터득한 구텐베르크는 1450년 무렵 라틴어 표준문법인 <도나투스>에 이어 1454년 <구텐베르크 성서>를 찍어낸다. 구텐베르크가 시위를 당긴 서양의 활판인쇄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불과 50여 년 만에 유럽 350개 도시에 1,000개 이상의 인쇄소가 생겼다. 그 사이 대략 3만 종, 900만 부의 서적이 출간됐다.

대중화하지 못한 조선의 인쇄술

반면 고려의 금속활자술을 계승한 ‘갑인자’를 제작한 조선의 인쇄술은 대중화의 길을 걷지 못했다. 어디서 명암이 갈렸을까. 우선 ‘시대가 구텐베르크를 낳았다’고 할 만큼 운이 좋았다. 당시 서양에서는 문양이 새겨진 펀치로 금덩어리를 강하게 때려 동전을 만들고 있었다. 또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짜내는 압착기가 있었다. 오늘날 인쇄기와 같은 뜻의 ‘프레스(Press)’다.
구텐베르크와 그의 후예들은 여기서 착안했다. 우선 펀치 끝에 날카로운 도구로 활자를 새긴다. 펀치 끝에 새긴 글자 모형을 조금 무른 구리 위에 대고 망치로 두들긴다. 그러면 구리판에 글자가 새겨진 공간이 생긴다. 글자가 새겨진 구리판을 수동주조기에 넣고 그 공간에 쇳물을 붓는다. 그 쇳물이 식어 굳으면 비로소 활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알파벳 활자를 만든 구텐베르크(혹은 그의 후예들)는 포도주 즙을 짜던 압착기 원리를 인쇄에 적용했다.

인터넷 혁명을 방불케 하는 인쇄 혁명

남북한 공동조사단이 찾아낸 금속활자

당대 유럽은 인쇄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다. 필경사 한 사람이 성서 1부를 필사하는데 3년이나 걸렸다. 끓어오르는 대중성서의 수요를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구텐베르크와 그의 후예들은 이 점을 파고들어 대중성서 판매에 뛰어들었다. 마르틴 루터(1483~1546년)의 종교개혁(1517년) 또한 인쇄술이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후예들은 루터의 종교개혁 선언문을 비롯한 연설문과 논문, 반박문 그리고 신구약 성서를 대량으로 찍어내 많은 돈을 벌었다. 루터는 “인쇄술은 복음 전파의 일을 도와주신 하느님의 가장 고귀하고 무한한 자비의 선물”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종교개혁뿐이 아니었다. 인쇄매체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정보를 얻게 되면서 폭넓은 식자층의 시대가 열렸다. 르네상스와 과학 혁명도 인쇄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혁명은 지금의 인터넷 혁명을 방불케 한다.
그럼 금속활자 발명국인 고려와 조선에서는 왜 혁명을 이루지 못했을까. 당시 제작한 금속활자 주조법과 인쇄법으로는 하루에 40여 장 인쇄한 것이 고작이었다. ‘모래주형’을 이용해서 주조하다보니 모래 알갱이와 쇳물 찌꺼기 때문에 활자가 깔끔하지도, 네모 반듯 하지도 않았다. 활자들이 조판·인쇄할 때 밀리거나 쏠리는 현상도 100% 막을 수는 없었다.
반면 서양에서는 금속(펀치) 끝에 글자를 새긴 뒤 구리판 등에 대고 망치로 두들겨 새겨 깔끔하게 주조했다. 또 활판을 조여 주는 장치, 즉 압축 인쇄기가 발달했다. 구텐베르크와 그의 후예들은 이렇게 이미 폭넓게 쓰였던 동전제작용 금속펀치와 포도주 압축기 등에서 얻은 아이디어로 인쇄술을 발전시켰다.

대중용이 아니었던 조선의 인쇄술

구텐베르크와 그의 후예들은 ‘맨땅에서 헤딩한’ 고려와 조선의 기술자들과는 달랐다. 다시 한 번 되짚어보자. 당대 우리에게는 가장 오래된 무구정광대다리니경(742년 무렵)을 보유할 정도로 목판인쇄에 강한 전통이 있었다.
물론 목판인쇄는 단점이 있었다. 새기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한번 삐끗해서 글자를 잘못 새기기라도 하면 그 목판 전체를 버려야 했다. 반면 금속활자는 기술 부족으로 ‘대량’은 불가능했지만 ‘소량’은 가능했다. 또 다른 서적 간행에도 재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니 빨리 전국에 알려야 할 윤음(국왕이 백성들에게 내리는 훈유의 문서) 같은 문서는 중앙에서 일단 금속활자로 소량 인쇄해서 각 도의 감사(도지사)에 내려 보냈다.
그러면 각 감사들은 그것을 다시 목판으로 새기거나 베껴서 예하 각 수령에게 배포했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목판이 ‘주()’이고, 금속활자가 ‘부()’였던 것이다. 또 평지보다는 산지가 많았던 조선에서는 아무래도 금속보다는 나무를 구하기 쉬웠다.
반면 활자를 만들 구리를 조달하기 위해 신료들에게 기부를 받고, 폐사찰에 방치된 동종까지 끌어썼다는 기록까지 있을 정도로 금속활자 제작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인쇄의 지향점도 달랐다. 조선의 서적은 기본적으로 대중용이 아니었다. 주로 왕실과 사대부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처럼 몇 부 찍어서 4~5대 사고(史庫)에 보관하는데 그쳤다. 가령 1577년(선조 10년) 관보를 상업용으로 인쇄해서 팔았던 업자 30여 명이 ‘국가기밀누설죄’로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지식의 확대 재생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조선은 처음부터 상업용 출판을 지향했던 서양과는 출발점부터가 달랐다.

알파벳 52자 한자 5만자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바로 문자다. 서양에서는 기본 26자 알파벳으로 모든 글자를 표현할 수 있다. 대문자와 소문자 두 종류를 쓴다 해도 52자면 모든 단어를 구현할 수 있다. 하지만 한자는 어떤가. 5만자가 넘는다.
세종이 창제한 한글은 어떤가. 현대 국어에서 표현될 수 있는 글자는 2,350~1만 1,172자 정도이다. ‘간난단’ 같은 고어(古語)와 한자를 섞어 써야 했던 조선시대 때는 어떠했으랴.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활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한문은 말할 나위 없고, 쉽다는 한글로 된 책을 금속활자로 제때 찍어내려면 엄청난 활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동양에서는 활판인쇄보다 목판인쇄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고려와 조선이 비록 금속활자 발명국이지만 서양의 구텐베르크 혁명과 같은 사회변화를 이끌 토양이 마련되지 못한 이유다. 안타깝지만 토양이 달랐으니 어쩔 수 없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