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2022년 임인년’을 시작한 것 같은데 벌써 달력이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 눈 깜박하면 2023년 검은 토끼의 해(계묘년)가 될 상황이다.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2019년 11월 중국에서 시작된 코로나19는 만 3년이 되도록 우리 곁을 떠날 생각이 없는 듯하다. 올 상반기 한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가 사회적 거리두기 같은 코로나19 방역 대책을 완화했다. 다행히 여름까지는 감소세를 보이는 듯 싶었는데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증가세를 보이고 올 겨울 재유행 가능성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19로 인해 지난 2년 동안 잠잠했던 계절성 인플루엔자(독감) 환자까지 늘고 있다. 질병관리청이 지난 11월 10일 발표한 ‘감염병 표본감시 주간소식지’ 45주차에 따르면 외래환자 1,000명 당 인플루엔자 의심 증상을 보이는 환자 비율(의사환자 분율·ILI)은 11.2명으로 1주 전 9.3명보다 20% 증가했다. 인플루엔자 환자는 10월 초부터 지금까지 매주 가파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이는 인플루엔자 유행기준인 1,000명 당 4.9명의 2배를 훌쩍 넘어선 상태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인플루엔자 환자가 급증하면서 10년 만에 최악의 독감 시즌이 다가왔다는 전문가들이 경고가 나오고 있다. 미국 질병예방통제센터(CDC)에 따르면 10월부터 11월 14일까지 최소 280만 명이 독감에 걸렸고, 2만 3,000명이 입원했으며 사망자는 1,300명에 이르렀다. 보통 인플루엔자 유행은 12월부터 이듬해 1월 사이에 정점을 찍는데, CDC에 따르면 올해는 평년보다 6주나 빨리 감염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호흡기세포융합바이러스(RSV)’로 인한 급성호흡기감염증 같은 바이러스성 호흡기 질환에 걸린 영유아 환자까지 늘고 있는 분위기다.
미국 CDC에 따르면 미국 각 지역에서 RSV 감염 환자 및 입원 환자수가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으며, 올 겨울 동안 증가세가 꺾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우울한 예측을 내놨다. 실제로 11월 15일을 기준으로 RSV에 감염된 노년층이 평년보다 10배나 많아졌다. 미국 노인 10만 명 중 6명이 RSV로 입원 중인데 이는 코로나19 유행 이전과 비교했을 때 10배나 높은 수치다. 다행히 국내에서는 RSV 감염 환자가 외국처럼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지는 않지만 200~300명을 기록하고 있는 만큼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RSV를 포함해 리노바이러스, 메타뉴모바이러스 등 바이러스성 급성호흡기감염증 환자를 모두 합하면 1,000명이 넘는다.
RSV는 건강한 성인의 경우 가볍게 지나가지만, 엄마를 통해 전달받은 면역력이 떨어지는 영유아나 기저질환이 있는 노년층은 쉽게 감염돼 심할 경우 폐렴을 일으키게 된다. 아이를 데리고 소아과에 갔을 때 ‘모세기관지염’이라고 진단을 받으면 대부분 RSV 감염이라고 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늦가을부터 겨울철까지 유행하는 바이러스성 질병이다.
코로나19 재유행에 계절성 인플루엔자 유행이 겹치는 ‘트윈데믹’을 넘어 RSV 같은 감염병까지 3종 이상이 동시에 유행하는 ‘멀티데믹’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이유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저널 ‘네이처’는 최근 ‘복수의 칼을 갈고 나타난 독감과 감기, 왜일까’라는 제목의 분석 리포트를 내고 멀티데믹의 가능성과 원인을 진단했다.
과학계에서는 독감과 RSV의 증가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바로 ‘면역학적 순수함(Immunologically Naive)’과 ‘약화된 면역(Waning Immunity)’이다. 영유아에게서 특히 유행하는 RSV 같은 경우 보통 1~2살 때 많이 감염된다. 그런데 코로나19 방역 덕분에 현재 3~4세 아이들은 영아 시절에 RSV와 접촉할 기회도 적어 관련 면역이 생길 기회가 아예 없었다는 것이다.
또 항체는 바이러스에 노출되지 않으면 줄어든다. 이 때문에 이전에 감염된 적이 있는 어린이나 성인의 경우도 기존에 갖고 있던 면역력이 약화됐다. 예전 같으면 약간의 바이러스에 노출되면 인체의 면역시스템이 가동돼 무증상이나 가벼운 증상으로 지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항체가 전무하거나 줄어든 요즘은 바이러스에 노출되는 순간 곧바로 감염될 위험이 커졌다는 설명이다.
이를 ‘면역 부채(Immunity Debt)’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사회적 거리두기다. 그러나 이 때문에 다른 병원균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것까지 막으면서 면역력이 약화되고 언젠가는 병에 걸리는 ‘갚아야 할 빚’으로 쌓이게 됐다. 특히 어린이들은 코로나19로 인해 면역력을 기를 기회를 얻지 못했다.
존 트레고닝 영국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대 면역학 교수는 “일부에서 이야기하는 ‘면역 부채’만으로 현재 상황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코로나19 이외의 감염병에 대한 집단 면역능력이 떨어져 언제든지 확산될 수 있는 조건이 된 것은 맞다.”고 설명했다.
버지니아 피처 미국 예일대 공중보건대 전염병학 교수 역시 “바이러스 입장에서 본다면 많은 나라들이 코로나19 방역조치를 완화한 뒤 처음 맞는 이번 겨울은 면역 부채 상환을 요구하기 좋은 때”라며 “때문에 올 겨울에는 인플루엔자가 극성을 부릴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예측했다.
미국 CDC 역시 “올해 인플루엔자 환자의 급증은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면서 면역력이 떨어졌기 때문일 수 있다.”며 “코로나19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만큼 코로나19 백신과 함께 독감 예방주사도 반드시 접종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