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

좋은 글씨를 쓰는 법

반가운 사람을 만날 때면 공책을 한 권 챙긴다. 당신에게 좋아하는 문장이 있는지 묻고 붓펜으로 그 문장을 표지 위에 쓰고 나름의 퍼포먼스를 펼치며 단 하나뿐인 공책을 선물한다. 재미 삼아 시작한 이 행위는 애정을 표현하는 나만의 방식이 됐다. 전시회, 축제 부스를 여럿 운영하면서 크고 작은 작품들을 만들어 봤지만, 직접 전해주는 글씨만큼 설레는 작업은 없었던 것 같다. 글씨를 선물하면서 장난스럽게 전하는 말이 있다. ‘내가 글씨를 주는 건 정말 모든 걸 주는 거야.’ 하지만 가볍게 던지는 농담에는 어느 정도 진심을 동반하는 법이다. ‘좋은 글씨를 쓰기 위해 수백 번 연습했던 시간을 당신에게 줄게. 나는 지금 온 힘을 다해 썼고, 이건 나의 애정 어린 마음이야.’ 이런 선물을 하고 싶어질 때마다, 나의 캘리그라피가 반짝 빛나는 것 같다.
김덕현 작가님의 캘리그라피 삶을 하나의 무늬로 바라보라

처음에 캘리그라피는 나를 위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군 생활을 하면서 시간이 날 때면 자주 책을 읽으면서 책 속의 좋은 문장들을 수집했는데, 공책에 적어놓곤 다시 보지 않아서 기억에서 사라지는 문장들이 아쉽게 느껴졌다. 이때 마침 캘리그라피에 대해 알게 됐고, 여러 책 속에서 공감하고 격려 받은 글들을 나만의 방식으로 필사하기 시작했다. 글과 어울리는 글씨체와 그림으로 천천히 종이를 채워나가는 과정 자체가 내게 큰 힘이 됐다. 마치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워가는 기분이었는데, 갑갑한 군 생활에서 잠깐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가 되어 주었다. 실력이 늘어갈 때쯤엔 주변 사람들에게 캘리그라피 엽서를 선물하기 시작했다. 서툰 내 선물이 마음에 들어 다행이고 내가 좋아하는 걸 같이 공감해주니 고마웠다. 금방 주고 온 선물이지만, 한참 대화를 나눈 기분이었다. 이렇게 글씨를 나누며 느낀 재밌고 설던 기억들이 내 캘리그라피의 신조 자체가 됐다.
내가 캘리그라피를 처음 시작했을 당시에도 많은 사람이 찾는 취미였는데, 지금까지도 그 인기가 꾸준하다. 아날로그, 빈티지의 유행에 따라 접하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무엇이든 너무 빨리 변해버리는 시기에 자신만의 속도를 찾고자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른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최근에 기억에 남는 글씨가 있다. 음식을 배달시켜봤다면 손글씨로 쓰인 감사 쪽지를 받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저희 가게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손글씨라고 착각할 정도로 정교하게 ‘인쇄된’ 손글씨 폰트 쪽지다. 수많은 폰트를 제치고 선택받은 손글씨 폰트,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고심한 사장님들의 선택이 우연은 아닐 거다. 손글씨에는 ‘정성’이 있다. 긴 시간 공들여 한 자 한 자 글씨를 써 내려가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그려진다. 이런 모습을 음식에 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긴 시간 공들여 만든 음식을 손님에게 대접하고 있다’는 진심을 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이런 매력을 무의식적으로 알아차린 사람들이 캘리그라피를 계속하는 건 아닐까. 집중해서 써 내려간 ‘정성’어린 글씨는 나를 격려하고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다운 취미로서 사랑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캘리그라피를 마음으로만 쓰는 건 아니다.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과정을 보면 꽤 골치 아픈 일이다. 캘리그라피는 ‘어떤 문장을 쓸 것인가’에서부터 시작한다. 우스갯소리로 나는 캘리그라퍼를 ‘좋은 문장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라고 말하는데, 마음이 가는 문장이 아니면 글씨를 쓰다 쉽게 지쳐버린다.
다음은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도구를 선택해야 한다. 큰 붓인지 작은 붓인지, 독특함과 우연의 느낌을 위해 직접 꺾은 나무로 글씨를 쓰기도 한다. 갖가지의 먹과 종이도 알맞게 활용해야 한다. 다양한 도구를 적용하는 이유는 글이 가지고 있는 느낌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함이다. 두꺼운 붓으로 자음을 크게 써서 귀엽게 표현할 수 있고, 얇은 펜으로 날카롭게 표현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마음에 들 때까지 반복해서 수십 번 다시 쓰면 된다. 물론 이외에도 글씨를 잘 쓰기 위해선 글씨의 조형, 균형미와 공간감을 잘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꽤 많은 것을 배워야 하지만 천천히 하면 된다. 글씨는 한 번에 늘지 않는다. 오히려 빨리 쓸수록 위태로워진다. 무엇이든 빨리 잘 해내야 하는 세상에서 천천히 해야 더 잘해낼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오히려 큰 위안이 된다.
요즘 나는 어떤 글씨가 좋은 글씨인지에 대한 고민이 많다. 많은 사람이 캘리그라피를 배우고 전문 캘리그라퍼가 되기를 지망하는 만큼 자신의 개성과 취향을 표현한 글씨체들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정답이 없는 예술 분야에서 정답을 찾으려는 행위가 무색할지 모르지만, 더 좋은 글씨를 쓰고 싶은 캘리그라퍼로서 발전 방향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확실한 건 ‘마음에 닿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 그리고 ‘여러 번 써야 좋은 글씨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이의 글씨가 하나의 캘리그라피라고 생각한다. 평소에 쓴 글씨만큼 오래 그리고 여러 번 쓴 글씨가 없지 않은가. 차이점은 단지 마음을 담았는가의 문제다. 그렇다면 세상엔 미약한 글씨란 없다. 좋아하는 문장을 지금 바로 써보자. 오래도록 당신을 표현한 평소의 글씨체로 좋은 글귀들을 쓰다 보면 내 삶은 꽤 단단해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