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과학 전래의 선두에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이 있었다. 실학의 비조라 일컬어지는 성호 이익은 경기도 안산 첨성리(瞻星里)라는 곳에 살았다. 별을 우러러 보는 마을이라는 뜻인 첨성리는 이름처럼 하늘의 별을 관측하기 좋은 곳이었다. 첨성리 서쪽에 달 뜨는 언덕배기 마을이라는 의미의 월피리(月陂里)라는 마을이 있었고 지금도 안산에는 반월(半月), 대월(大月)이라는 지명의 동네가 있다.
성호는 서양천문학을 비롯한 다방면에 관심을 가진 학자였다. 그 가운데서도 천문에 각별한 관심이 있었다. 그가 쓴 백과전서식 저술인 『성호사설』 첫 장은 「천지문(天地門)」으로 시작한다. 『천지문』에는 천문과 지리에 관한 성호의 해박한 지식이 담긴 223개의 글이 실렸다. 그는 “별의 운행을 관측하여 그 차례를 알지 못하고서, 어떻게 역법에 밝을 수 있겠는가?”라며 천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서양과학을 받아들이기 이전에 성호는 여느 선비들처럼 중화 중심의 사고를 하고 있었다. 그의 천문학적 지식이 동시기 유학자들보다 한 발 더 깊숙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 이하진이 1678년 중국에서 사 온 서책 중에 서양의 과학을 소개하는 책들이 여러 권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호는 서양의 천문과 역법, 지도 등을 통해 서양의 자연과학의 탁월함을 확인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성호사설』에서 “지금 실시하는 시헌력은 서양사람 탕약망(아담 샬)이 만든 것인데, 여기에서 역법은 최고에 도달했다. 서양역법인 시헌력으로 계산하면 해와 달의 교차 및 일식과 월식이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공자가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 법을 따를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서양의 과학 수준을 깊이 신뢰하였다.
서양의 천문지리에 대한 성호의 관심은 호기심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서양의 앞선 지리와 수리를 이용해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는 방안을 찾으려는 자세로 귀결됐다. 서양의 지식이라 해서 모두 과학적인 바탕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성호는 깊이 따져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전통적인 세계관으로 유보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했다.
성호 이익은 당시 우주관인 혼개설에 바탕을 둔 천체관에서 다시 서양의 구중천(九重天)과 십이중천설(十二重天說)로 그 관심 영역을 넓혔다. 중천설이 전파되기 이전, 동양은 천문도(天文圖) 상에 표현된 삼원(三垣) 이십팔수(二十八宿)를 중심으로 평면적으로 구획 짓는 천문 인식 체계였다. 삼원 이십팔수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하늘의 별자리를 정한 것으로, 삼원은 자미원(紫薇垣), 태미원(太微垣), 천시원(天市垣)을 가리키며 이십팔수는 해와 달 그리고 여러 행성의 소재를 밝히기 위해 적도에 따라 천구를 스물여덟으로 구분한 것을 말한다. 그러다가 성호는 기존 동양의 평면 천문도와 달리 육면체의 서양 천문도인 방성도(方星圖)라 불리는 새로운 천문도를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