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성호 이익이 본 서양천문도,

방성도

별을 사랑한 민족

우리 선조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하늘의 별을 사랑했다. 우리 땅 곳곳에는 하늘과 별자리에 깊은 관심을 뒀던 선조들이 남긴 흔적들로 가득하다. 한반도 전역에 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이 그린 별자리 그림, 별자리를 새긴 암각화와 고인돌을 만날 수 있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는 유명한 첨성대가 있으며, 조선 태조 4년(1395)에 돌에 별자리를 새긴 국보 제228호인 천상열차분야지도 (天象列次分野之圖)는 우리 민족의 천문학 수준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또한 세종대왕은 15세기에 세계 최강의 천문학 강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 조선이 중국식 천문도의 수립과 전승에 몰두하는 동안 유럽발 르네상스와 지리상의 대발견은 새로운 근대 천문도의 전개로 나아갔고, 그 일부가 청나라 흠천감 소속의 서양 선교사 출신 천문학자를 통해 개발된 새로운 서양식 천문도의 수용으로 나타났다.
17세기 이후 서양 선교사 출신의 천문학자들이 주동이 된 서양과학문물이 전래되면서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기 시작했다. 1603년 명에 갔던 사신 이광정이 유럽지도인 <곤여만국전도>를 가져온 것을 시작으로 선조, 광해군 연간에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가 전해졌다. 인조 때 사신 정두원이 북경에서 선교사 로드리게스를 만나 화포, 천리경, 자명종, 만국지도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1646년에는 소현세자가 귀국하면서 아담 샬에게 선물로 받은 천주교 서적과 『시헌력』을 비롯한 과학서적을 가져왔다.

서양과학을 통해 넓은 시야를 갖게 된 성호 이익

서양과학 전래의 선두에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이 있었다. 실학의 비조라 일컬어지는 성호 이익은 경기도 안산 첨성리(瞻星里)라는 곳에 살았다. 별을 우러러 보는 마을이라는 뜻인 첨성리는 이름처럼 하늘의 별을 관측하기 좋은 곳이었다. 첨성리 서쪽에 달 뜨는 언덕배기 마을이라는 의미의 월피리(月陂里)라는 마을이 있었고 지금도 안산에는 반월(半月), 대월(大月)이라는 지명의 동네가 있다.
성호는 서양천문학을 비롯한 다방면에 관심을 가진 학자였다. 그 가운데서도 천문에 각별한 관심이 있었다. 그가 쓴 백과전서식 저술인 『성호사설』 첫 장은 「천지문(天地門)」으로 시작한다. 『천지문』에는 천문과 지리에 관한 성호의 해박한 지식이 담긴 223개의 글이 실렸다. 그는 “별의 운행을 관측하여 그 차례를 알지 못하고서, 어떻게 역법에 밝을 수 있겠는가?”라며 천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서양과학을 받아들이기 이전에 성호는 여느 선비들처럼 중화 중심의 사고를 하고 있었다. 그의 천문학적 지식이 동시기 유학자들보다 한 발 더 깊숙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 이하진이 1678년 중국에서 사 온 서책 중에 서양의 과학을 소개하는 책들이 여러 권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성호는 서양의 천문과 역법, 지도 등을 통해 서양의 자연과학의 탁월함을 확인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성호사설』에서 “지금 실시하는 시헌력은 서양사람 탕약망(아담 샬)이 만든 것인데, 여기에서 역법은 최고에 도달했다. 서양역법인 시헌력으로 계산하면 해와 달의 교차 및 일식과 월식이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공자가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반드시 이 법을 따를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서양의 과학 수준을 깊이 신뢰하였다.
서양의 천문지리에 대한 성호의 관심은 호기심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서양의 앞선 지리와 수리를 이용해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는 방안을 찾으려는 자세로 귀결됐다. 서양의 지식이라 해서 모두 과학적인 바탕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성호는 깊이 따져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전통적인 세계관으로 유보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했다.
성호 이익은 당시 우주관인 혼개설에 바탕을 둔 천체관에서 다시 서양의 구중천(九重天)과 십이중천설(十二重天說)로 그 관심 영역을 넓혔다. 중천설이 전파되기 이전, 동양은 천문도(天文圖) 상에 표현된 삼원(三垣) 이십팔수(二十八宿)를 중심으로 평면적으로 구획 짓는 천문 인식 체계였다. 삼원 이십팔수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하늘의 별자리를 정한 것으로, 삼원은 자미원(紫薇垣), 태미원(太微垣), 천시원(天市垣)을 가리키며 이십팔수는 해와 달 그리고 여러 행성의 소재를 밝히기 위해 적도에 따라 천구를 스물여덟으로 구분한 것을 말한다. 그러다가 성호는 기존 동양의 평면 천문도와 달리 육면체의 서양 천문도인 방성도(方星圖)라 불리는 새로운 천문도를 보게 되었다.

정교한 천문도 방성도

방성도
‘방성도’는 중국명으로 민명아(閔明我)이다. 이탈리아 선교사 그리말디(Philippus Maria Grimardi, 1639~1712)가 동양의 별자리를 유럽의 작도법에 따라 제작한 6면체 지도이다. 방성도는 천구를 일종의 육면체로 파악하여 육면체의 상하에 해당하는 북극권과 남극권을 거극(踞極) 45°가량으로 잘라내고, 천구를 동일한 크기와 모양의 여섯 조각으로 나눈 육면체 형태의 천문도이다.
방성도는 동양의 성좌를 유럽의 작도법으로 제작한 것으로 접으면 6면체로 만들 수 있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기존의 평면으로 그려진 천문도가 중간 부분은 촘촘하고 바깥으로 갈수록 왜곡되어 점점 벌어지는 단점을 지적하며, 방성도는 천체를 상하 2면, 사방 4면, 모두 6면으로 나누어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의 별자리를 정교하게 분해해 놓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상하·좌우 90도에 불과한데, 이를 분리하여 상하를 두 폭, 사방으로 네 폭으로 만들어 거리에 따라 촘촘한 상태가 일정하고 틀리지 않으니 그 착상이 세밀하다고 칭찬한 것이다.
성호 이익은 “지금 서양의 방성도를 보면 중국과 다르다. 더러는 연결한 선만 있고 별은 없는데 이는 그곳에서 망원경으로 관측한 것이다”고 동서양 천문도를 비교하면서 “여섯 조각의 방성도가 서양에서 나왔는데, 제도가 기묘하여 중국 사람들에 미칠 바가 아니다”라며 천문도로서 방성도의 우수성을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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