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성리학의 우주관에서

서양의 우주관으로

서양천문학과의 만남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서양과학이 중국 명·청시대와 조선시대 식자층에게 급속하게 파급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한문으로 쓰인 책 때문이었다. 일명 ‘한역서학서’라 불리는 한자로 쓰인 서양서들은 한문으로 쓰여 있다는 강점 때문에 17~18세기 중국과 한국에 카톨릭과 서양 문물 전수를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와 같은 세계지도가 들어오면서 시작된 서구에 대한 이해는 조선 지식인들의 중국 베이징으로의 사행(使行)이 빈번해지면서부터였다. 특히 인조 9년(1631년) 음력 7월 명나라에 간 사신 정두원이 포르투갈 출신의 신부 로드리게즈(Johanes Rodriguez)를 통해 당시 서양 신부들이 한자로 쓴 천문, 지리, 역산 등에 관한 서적과 화포, 천리경(망원경), 자명종 등 새로운 기기들을 전해 받고 조선으로 가지고 들어와 지식인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정두원이 가지고 온 한역서학서와 서구 문물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다. 이탈리아 출신의 신부 알레니(Julius Aleni)의 『직방외기』와 같은 세계지리서를 비롯해 서광계와 롱고바르디의 공저로 서양 역법의 연혁을 설명한 『치력연기』, 마테오 리치의 천문서, 광학기 서적과 천문도 및 세계지도 등 최신의 한역서학서가 망라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된 천문학이 당시 서양에서는 최신의 천문 지식이 아니었다. 서양의 천문학은 기존의 천동설에서 이미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로 교체된 상태였는데 선교사들은 카톨릭에서 인정하는 천동설, 즉 프톨레마이오스의 중세적 우주관을 중국에 전파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이 실려 있는 『천문략』과 『치력연기』 같은 한역서학서들은 연행사들에 의해서 실시간으로 조선에 전래되었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비록 중세 우주관이긴 하나 서양의 우주관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 알려진 안정복의 『잡동산이』에는 당시 정두원과 함께 중국 연경(베이징)으로 간 역관 이영후가 선교사로부터 얻은 『천문략』을 읽고 탄복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는데, 사실 선교사 디아즈가 지었다는 『천문략』은 앞서 언급한 대로 천동설을 바탕으로 한 12중천설을 소개하고 있는 천문학서였다. 이처럼 비록 『천문략』이 최신의 서양 우주론을 소개한 것은 아니었지만, 개천설이나 혼천설 등 중국 고대 천체관의 테두리에서 만족하던 조선 지식인층의 반응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이로 인해 우주관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되었음은 물론이다.

우주관이 변화하다

하늘이 여러 겹으로 싸여 있다는 ‘중천(重天)’의 개념은 동서양에 모두 존재했다. 중국에서 중천의 개념은 『초사(楚辭)』 천문편에 실려 있는 ‘구천설(九天說)’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초사』의 구천설은 하늘을 아홉 방위로 나눈 것으로, 다분히 오행(五行)사상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주자가 『초사집주(楚辭集注)』에 ‘기의 회전운동’으로서의 천을 설명하면서 구천설의 개념을 성리학적 우주구조론의 중천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주자는 “기의 회전은 땅의 바깥에서부터 멀면 멀수록 빠르고 맑으면 맑을수록 강해서, 양의 수를 9까지 밀고 나가면 매우 맑고 강해 다시 그 끝이 없는 것”으로 구중천의 개념을 정의했다. 그러나 결코 고정된 물체로서의 하늘의 중층이 아니라 기의 회전 속도에 근거한 우주 공간의 구분이었다. 다시 말해, 회전 속도가 다른 아홉 겹의 기의 공간인 것이다. 그러나 주자의 구천설은 다분히 난해하고도 형이상학적이었다. 때문에 조선시대 주자학의 물결 속에서도 주자의 우주론만큼은 그다지 실체적인 우주관으로 인식되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하늘이 여러 겹으로 나뉘어 있다고 인식하게 된 것은 주자의 구천설에 의해서가 아니라 『천문략(天文略)』이라는 한역서학서를 통해서였다. 『천문략』에 소개되어 있는 12중천설은 바빌론 이후, 중세까지의 서구 우주관을 대표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체계를 토대로 한 우주관이었다.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9중 또는 12중의 동심원 구조를 한 유한한 구조라는 중세적 우주체계는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의 등장으로 무너졌지만, 천주교의 교리 설명이라는 견지에서 명말 청초에 중국에 온 예수회 신부들은 여전히 이와 같은 중세 서양의 우주관을 중국에 전파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에서 볼 수 있다시피 하늘은 하나의 공간이었다. 이런 점에서 『천문략』의 중층적 하늘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천문략』은 1631년 연경에 사신으로 간 정두원(鄭斗源)이 가져오면서 조선에 널리 유포되었으며 그동안 도외시되었던 우주구조론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12중천의 전체 형태는 모두 둥글며 각기 정해진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각 층은 서로 에워싸서 마치 양파처럼 되어 있고, 각기 본천(本天)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는 형태를 하고 있다. 이와 같은 12중천설은 상제가 거처하는, 정지해 움직이지 않는 천()을 상정한 다분히 종교적인 천문관이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주자의 구천설에서 보이는 기의 회전으로서의 중천 개념과 거의 흡사해 점차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의 지식인에게 설득력 있게 전해졌다.
『곤여만국전도』

이와 함께 조선 후기에 국가에서 편찬한 천문서, 즉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상위고(象緯考)〉가 12중천설을 정통설로 인정함으로써 서양의 12중천설이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우주구조론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더욱이 『증보문헌비고』는 “천문가가 하늘에 열두 겹이 있다고 하나, 하늘은 이렇게 여러 겹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대개 일월성신이 하늘에서 운행하는 데 각각 다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여 12중천설에 대한 잘못된 오해도 지적했다. 사실 12중천설은 『증보문헌비고』를 통해 공식적으로 인정받기 전부터 여러 실학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은 우주론이었다.
특히 성호 이익은 장자나 주자의 말을 빌려 12중천설의 합리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성호 이익이 이렇듯 적극적으로 12중천설을 지지한 데에는 그 이론이 당시로는 극히 신기했을 뿐만 아니라 서양천문학의 정확성이 실증적으로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서양 신부들이 작성한 시헌력이 종래의 대통력보다 훨씬 정확하고 과학적임을 알았던 성호는 서양천문학의 정확성에 강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서양의 12중천설에서 다룬 남북세차와 동서세차에 대한 성호 이익의 경탄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즉 남북, 동서세차의 움직임이 매우 미세해 그동안 이를 그대로 두고 다루지 못했었는데 서양의 천문학이 이를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서양의 12중천설은 더욱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올 수 있었다. 12중천설은 당시 서양에서는 진부한 우주론이었으나 조선 천문학가들의 눈에는 새로운 경지였다. 12중천설의 우주 형태는 성호의 한탄대로 “망원경을 구하지 못해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일 정도였던 것이다.
성호 이익과 같은 인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던 12중천설은 18세기로 접어들면서 그 생명력을 다하고 만다. 티코 브라헤로 대표되는 더욱 발전된 우주구조론이 수용되고, 서양 선교사들이 인정하지 않았던 지구의 자전이 김석문(金錫文, 1658∼1735)과 같은 뛰어난 자연학자에 의해 주장되면서 조선 후기 천문학은 바야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맞게 된 것이다.
조선 후기에 등장한 지전설은 서양천문학의 수용이 표피에만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한역서학서 중에 지구의 자전을 설명한 것으로 『오위역지(五緯曆指)』라는 서적이 있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정설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그 외 독일계 서양신부 쾌글러가 지전설을 기초로 한 타원궤도설을 바탕으로 태양과 달의 운동을 계산했으나 천체관은 여전히 천동설을 채택하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 지전설의 주창은 조선시대 천문학의 수준을 짐작케 해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서양천문학의 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