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첨성대의 비밀

잊혔던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

한국 사람치고 신라 천 년의 고도(古都) 경주를 다녀오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경주하면 불국사와 석굴암이 대표적이지만, 신라의 도성인 반월성 동북쪽 방향에 있는 우아한 병 모양의 석조물인 국보 제31호 첨성대 또한 신라를 대표하는 문화재이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첨성대는 높이 9.108미터에 밑지름이 4.93미터이며, 1미터의 직사각형 창문이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하늘을 관측하는 데 사용된 것으로 짐작되는 첨성대는 과연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우리 역사에서 첨성대에 관한 기록이 처음 나오는 것은 13세기 후반 일연이 쓴 『삼국유사』이다. 이 책에서 일연은 “선덕여왕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였다. 일연이 보았다는 첨성대 관련 기록은 현재로는 확인할 수 없다. 아쉽게도 『삼국유사』 보다 먼저 쓰인 『삼국사기』에는 첨성대 기록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첨성대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특히 『동국여지승람』에 “첨성대 안이 비어 있으며 사람이 그 가운데로 오르내리며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첨성대에 관한 문헌 기록이 너무 적지만, 우리 선조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하늘에 관심을 두고 천문대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선조인 신라인의 천문학 지식을 엿볼 수 있는 첨성대는 무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있었다.
첨성대의 가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였다. 와다 유지라는 일본인 천문학자가 첨성대의 역사적인 가치를 알아보고 세상에 알리면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되살아날 수 있었다. 와다에 따르면, 처음 첨성대를 조사할 당시에는 첨성대 안에 흙과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온갖 쓰레기들이 그 안을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과학 유산인 첨성대가 이처럼 오랫동안 버려져 있다가 일본인의 눈에 띄어 겨우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다?

창경궁 관천대

우리나라 학자에 의해 첨성대가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부터이다. 문제는 첨성대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첨성대의 구조가 천문 관측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첨성대를 본 사람은 누구나 느끼겠지만, 모양이 참으로 오묘하다. 첨성대의 특이한 병 모양은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아무래도 천문 관측 이외의 다른 목적이 있기 때문에 특이한 병 모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의문의 시작은 첨성대 중간쯤에 나있는 창문에서 출발한다. 첨성대 중간에 있는 창문이 과연 천문을 관측하는 사람들이 매일 드나드는 출입구로 적당한가가 주된 의문점이었다. 첨성대가 천문대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첨성대 안에다 사다리를 만들어 놓고 오르내렸으며, 정상부에는 별을 관측하는 기구인 혼천의를 설치하였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첨성대 안이 너무 비좁고 사다리가 있건 없건 간에 좁은 창문을 통해 오르내리기가 불편하기 때문에 관측 목적이라면 더 편리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관측보다는 태양의 그림자를 측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약 하늘을 관측할 목적으로 첨성대를 만들었다면 위로 갈수록 크기가 점점 줄어드는 위험한 탑 모양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첨성대에 대해 다양하게 분석했지만, 확실한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첨성대가 상징하는 것들

고려시대 첨성대_국립민속박물관 『천문』 도판 24

첨성대는 아랫부분에서부터 헤아려 올라가면 27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27개의 단은 모두 365개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27과 365라는 개수는 한 달의 날수와 1년의 날수를 나타낸 것이라 해석되기도 한다. 첨성대의 가장 위쪽에는 우물 정자() 모양으로 네모진 큰 돌이 십자 형태로 놓여 있다. 이것은 땅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처럼 둥근 병 모양 위에 네모난 큰 돌을 얹어 놓은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 모양은 네모나다』라는 우리 선조들의 우주관이 반영된 상징물이라는 해석도 있다. 망원경도 없고 우주를 관찰할 수 없었던 그 시대에 우리 조상들은 하늘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고, 땅은 네모난 모양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 외에도 첨성대가 천문관측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불교에서 가장 성스러운 산의 모델로 여기는 수미산(須彌山)을 본뜬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처럼 첨성대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서로 의견이 다르다. 경주에 남아있는 첨성대의 구조와 옛 기록만으로는 실제 천문을 관측하던 곳이었는지, 아니면 상징적인 구조물이었는지, 또는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었는지 분명하게 증명할 수는 없다. 이를 만들었던 신라인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 한 이 문제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첨성대는 가장 완벽한 형태와 훌륭한 기능을 가진 천문대였다는 점은 분명하다. 다만 신라의 천문관측대의 용도와 목적이 오늘날과 달랐을 뿐이다.

천문에 관심이 많은 우리의 선조들

우리 선조들은 하늘에 대해 관심이 매우 컸다. 천 년 전에 첨성대를 만든 것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또 일찍부터 태양의 흑점이 기상 변화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었다. 하늘을 관측할 수 있는 천문대는 비단 신라 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라 유산을 계승한 고려와 조선에도 천문대가 있었다.
개성에 세워진 고려 시대의 천문대는 그 이후에 만들어진 조선 시대의 천문대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천체 망원경도 없던 시대에 사람들은 주로 어떤 관측을 했을까? 신라인을 비롯한 우리 선조들은 천체 현상 가운데서도 일식과 혜성에 관심이 많았다. 신라에 이어 고려 시대 천문학자들은 천문대에서 일식과 혜성의 출현 등 천문 현상을 면밀하게 관측하여 기록하고 이를 왕에게 아뢰었다. 고려 시대 역사를 적어 놓은 『고려사』란 역사책에는 태양의 흑점을 비롯한 하늘의 여러 가지 현상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중세 이슬람의 천문 기록과 함께 세계적인 천문 관측 기록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경주 첨성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