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속 과학읽기

‘고흐’의 삶,
작품에 과학이 깃들다

프랑스 아를

프랑스 남부 아를은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도시다.
주요 작품의 배경이 된 집과 강, 풍경들이 길목 곳곳에 담겨 있다.
네덜란드 출신인 고흐는 화가 인생의 후반부를 아를에서 보내며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천재 화가의 삶과 작품에도 과학은 깃들어 있다.

고흐의 노란색 물감과 보존과학

고흐의 작품으로 만든 엽서들

아비뇽에서 열차를 갈아타고 30여 분. 아를역에 내려 여유롭게 걸으면 북서풍이 불어오는 론 강 옆으로 작은 도시가 모습을 드러낸다. 고흐는 프로방스의 햇살이 내리쬐는 아를에서 사람과 정물, 풍경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해바라기’, ‘노란 집’, ‘밤의 카페 테라스’ 등이 대표작이다.
고흐가 왕성하게 활약하던 19세기 말에는 튜브에 담긴 물감이 새롭게 선보였다. 이 튜브 물감들의 주요 재료가 원자번호 24인 ‘크로뮴’이다. 노란색을 좋아했던 고흐는 ‘해바라기’, ‘고갱의 초상’, ‘아를의 붉은 포도밭’ 등 아를에서의 주요 작품에 강렬한 ‘크로뮴 옐로’를 애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크로뮴 옐로의 주성분인 크로뮴산 납은 유독성 물질로 병약했던 작가의 건강을 위협하기도 했다.
크로뮴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들은 변색이라는 취약성을 지니고 있었다. ‘크로뮴 옐로’는 자외선 등 특정 빛과 만나면 갈색톤으로 변했다. 고흐의 유작들은 후대에 보존 과학의 큰 원동력이 됐으며, 현재까지 다각도로 복원이 진행 중이다. 엑스선 형광분석법으로 수백억 원대 작품 속에 다른 밑그림이 발견되거나, 원자 분석에 쓰이는 입자가속기와 전자현미경이 보존 및 복원에 동원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을 통해 3D로 재현돼 색채뿐 아니라 작품의 옛 질감을 직접 만져보는 전시까지 이뤄지고 있다.
카페

아를에서 탄생한 불후의 명작들

생 트로펌 성당

고흐는 아를에서 미술공동체를 꿈꿨고 프로방스 마을의 색에 매료돼 다채로운 작품들을 남겼다. “과거에 이런 행운을 누려 본 적이 없다.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랗고, 태양은 창백한 유황빛으로 반짝인다. 천상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푸른색과 노란색의 조합은 얼마나 부드럽고 매혹적인지….” 고흐가 그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를에 대한 찬미가 적혀 있다.
‘노란 집’, ‘아를 병원의 정원’, ‘밤의 카페 테라스’ 등 강렬한 색채의 작품들은 도시의 매혹이 자양분이 됐다. 밤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이 된 포룸 광장의 카페는 노란색으로 치장된 채 여전히 성업 중이다. 이곳 카페에서 홀짝홀짝 들이키는 것은 커피나 맥주가 아닌 압생트다. ‘미치광이의 술’로 불리는 압생트는 고흐가 즐겨 마시던 70도가 넘는 독주로 한때 제조가 금지되기도 했다. 시인, 화가들이 애호하던 술은 최근 독소를 제거하고, 40도 정도로 희석된 채 그들의 작품 세계를 추억하며 팔려나간다. 한낮에도 카페와 술집들은 상념에 잠긴 채 골목과 햇살을 응시하는 이방인들로 빼곡하다.

병원, 카페, 강변이 화폭에 담기다

아를의 골목들은 고흐의 자취를 따라 ‘노란 발자국’ 표시로 길을 안내하고 있다. 포룸 광장의 골목을 벗어나면 론 강으로 연결된다. 강변길은 고흐가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려낸 공간으로 파스텔톤의 프로방스 가옥들이 강변에 펼쳐진다. 아를역에서 가까운 라마르틴 광장의 집에 머물며 고흐는 ‘노란 집’을 그렸다. 고갱은 고흐의 노란 집에서 2개월간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 고흐가 치료받던 병원인 에스빠스 반 고흐는 문화센터로 용도가 바뀌었지만, 작품 속 정원처럼 매년 화려한 꽃이 핀다.
개폐교인 랑글로아 다리, 천년 역사를 간직한 묘지인 알리스깡의 오솔길 역시 고흐 작품의 소재였다. 아를의 관광지 중 교외로 나서야 닿는 랑글로아 다리는 견습 화가들에게는 훌륭한 오브제다. 다리는 예전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으며 인근에서는 거장의 온기를 스케치북에 담는 사람들을 흔하게 목격할 수 있다.
론 강 전경

세계유산에 등재된 고대 건축물

기원전 로마시대 유적, 원형경기장

골목길이 단정한 ‘고흐의 도시’는 소담스러운 규모와 달리 지난한 역사도 간직했다. 도심 한편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기원전 로마시대 유적인 원형경기장이 웅크리고 있다.
로마 율리시스는 아를을 지중해까지 내달을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여겼다. 기원전 100년 즈음에 원형경기장인 아레나와 고대 극장 등을 세웠으며 그 잔재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유적들은 현실의 세계로 접어들며 쓰임새가 다양하게 변모한다. 아레나에서는 한때 투우 경기가 열렸고, 고대 극장은 오페라 축제 등의 무대로 다시 태어났다.
여행자들이 집결하는 리퍼블릭 광장에 들어서면 로마네스크 양식의 시청사와 ‘최후의 심판’ 조각이 인상적인 생 트로펌 성당 등과 마주친다. 광장의 중앙에는 프로방스의 시인, 프레데릴 미스트랄의 동상이 묵묵히 아를의 시간을 대변한다.
미술공동체의 초대에 유일하게 응했던 고갱마저 곁을 떠나자 고흐는 귀를 잘라내며 번뇌했다. 아를의 병원에서 나온 고흐는 생 레미의 요양소로 거처를 옮긴 뒤 마지막에는 동생이 있는 파리 인근 오베르 쉬르 오아즈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인생 여정은 험난했지만 작품 활동은 끝까지 쉼표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