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유금이 만든 서양식 별시계,

혼개통헌의

천문학과 수학을 좋아한 실학자, 유금

유금(柳琴, 1741~1788)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중 한 사람인 유득공의 숙부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서호수 등과 교우한 북학파 실학자 중의 한 명이다. 평생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고 학문과 예술을 즐기며 북학파 벗들과 교유한 인물이다.
유금은 거문고를 좋아하여 자를 탄소(彈素)라 하고, 원래 이름이 유련(柳璉)이었으나 이 이름 대신 거문고 금()자를 써서 유금으로 개명하였다. ‘탄소’는 ‘탄소금(彈素琴)’의 준말로 소금을 연주한다는 의미이다.
유금은 천문학과 수학을 좋아했다. 자신의 서재에 ‘기하실’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기하는 마테오 리치가 중국에 소개한 서양의 수학인 『기하원본』에서 따온 것이다. 유교경전을 읽고 해독하는 것이 선비들의 최고의 도였던 시대에 천문학이나 수학은 말단의 학문이었다. 공부해 봐야 과거시험에도 나오지 않았고 선비가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학문으로 여겨졌다.
천문학과 수학에 몰두한 유금이었지만, 그가 남긴 저술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인장 새기는 것을 좋아하고 자신의 책에 인장 찍기를 즐겨한 그였지만, 그의 책은 거의 다 사라지고 없다.
연암 박지원은 유금이 인장을 새길 때면 돌을 쥐고 무릎에 받치고서 어깨를 비스듬히 하고 턱을 숙인 채, 눈을 깜빡이며 입으로 후후 불면서 먹 자국에 따라 누에가 뽕잎 갉아먹듯 파고 들어가는데 마치 실처럼 가늘면서도 획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친한 벗 이덕무가 하루는 그 모습을 보고 “자네는 그 굳은 돌멩이를 힘들게 새겨서 무엇에 쓰려고 하는 건가?”라고 물었다.
“천하의 모든 물건에는 주인이 있고, 주인이 있으면 이를 증명할 신표가 있어야 하네. 그러기에 열 집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고을이나 백부장(百夫長)까지도 부절(符節)이나 인신(印信)이 있었던 것일세. 주인이 없으면 흩어져 버리고 신표가 없으면 어지러워지거든.”

유금의 혼개통헌의가
세상에 나오다

실학자 유금의 혼개통헌의(실학박물관 소장, 보물 제2032호)

오늘날 아쉽게도 그가 새긴 인장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의 손길이 담긴 천문기구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나타났다. 유금이 만든 아스트로라브가 세상에 공개된 것은 2002년이다. 2002년 일본 시가현 오오미하치만시의 토기야(磨谷)가 일본 동아천문학회 이사장인 야부 야스오에게 검토를 의뢰하면서부터이다. 토기야의 조부가 1930년경에 대구에서 구입하여 패전한 후 일본으로 가져온 것이다.
처음 아스트로라브가 일본에서 공개될 때는 누가 만든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앞면 위쪽 고리 부분에 ‘유씨금(柳氏琴)’이라는 인장이 고문헌 연구자인 박철상에 의해 해독되면서 이 귀중한 작품의 제작자가 유금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아울러 혼개통헌의 청동 고리에 새겨진 “북극출지 38도(한양의 위도) 1787년에 약암 윤 선생(이름 미상)을 위해 만들었다(北極出地三十八度 乾隆丁未爲約菴尹先生製)”라는 기록을 통해 제작연도도 알게 되었다. 이후 동아시아 전통 천문학의 권위자인 미야지마 카즈히코 교수에 의해 18세기 동아시아인이 만든 것으로는 유일한 것으로 학계에 보고되었다.
서양의 휴대용 천문기구인 아스트로라브는 14세기 기계 시계가 고안되기 전까지 고대와 중세 여행자들에게 가야 할 방향과 시간을 알려주는 가장 정교하고 정확한 천문시계였다. 명나라 말기에 클라비우스(Christoph Clavius, 1538~1612)의 아스트로라브 해설서인 ‘아스트롤라븀(Astrolabium)’(1593)을 학자 이지조(1569~1630)와 마테오 리치가 『혼개통헌도설(渾蓋通憲圖說)』(1607)로 제목을 붙여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이후로 아스트로라브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혼개통헌의(渾蓋通憲儀)’라는 이름으로 청과 조선에 전래되었고, 일본은 16세기에 서유럽을 통해 직접 전래되었다.

천문계산기, 혼개통헌의

유럽의 아스트로라브

아스트로라브 즉, 혼개통헌의의 앞면은 일종의 천문계산기이다. 앞면에는 ‘레테(Rete)’라고 불리는 구멍 뚫린 판이 있는데 이것을 돌려가며 원반 아래에 새겨진 눈금선을 통해 천체 관측값을 얻는다. 레테의 기본 뼈대에는 다양한 개수의 ‘지성침(指星針)’이 있는데 조선시대 유금이 만든 혼개통헌의에는 모두 11개의 지성침이 있다. 유럽에는 지성침이 40개나 되는 아스트로라브도 있다. 이 지성침들은 특정 밝은 별을 가리키도록 맞추어져 있다. 유금의 아스트로라브에는 규대(圭大) 즉 규수대성(Mirach), 필수대성, 삼좌견성을 비롯한 11개의 특정 별을 가리키도록 제작되어 있다.
모체판 앞면의 중심은 하늘의 북극을 나타내며, 이곳의 구멍에 핀을 박아 성좌판을 회전시킬 수 있도록 했다. 바깥쪽 둘레에는 지름 16.7cm인 원이 그려져 있다. 그 안쪽으로는 지름 16cm와 15.4cm의 동심원 사이에 2도 간격으로 눈금이 있고, 그 안쪽을 24등분하여 아래쪽은 자초와 자정의 경계로, 위쪽은 오초와 오정의 경계로 삼아 십이지에 초()와 정()을 붙인 시각 이름을 시계방향 순서로 새겨 놓았다. 모체판 뒷면은 2도 간격의 눈금까지는 앞면과 같지만, 그 안쪽은 10도마다 눈금이 있고 30도씩 등분되어 황도 12궁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아울러 24등분하여 24절기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해시계 역할을 하는 도표라 할 수 있다.
유금의 혼개통헌의는 한·중·일 통틀어 자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전형적 형태의 아스트로라브이다. 2019년 혼개통헌의라는 이름으로 보물 제20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유금의 혼개통헌의는 동아시아 특히 조선시대 서양근대 과학의 전래와 수용을 고찰하는 데 있어 귀중한 유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