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

느림의

미학

“좀 더 큰 카메라로 찍지 않아도 돼요?” 사진을 의뢰한 고객이 물었다. 내 카메라를 물끄러미 보고 살짝 조바심이 났나 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사용하는 라이카는 카메라를 잘 모르는 사람 눈에는 그저 예쁜(?) 카메라이다. 1시간 30여 분 촬영을 하고 끝난 뒤 또 의뢰인이 물었다. “사진 잘 나왔겠지요? 미리 볼 수는 없을까요?” 내가 대답했다. “저도 사진을 보려면 현상하고 스캔한 뒤 가능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일주일 뒤 다시 의뢰인을 만났다. 그리고 사진을 전달했다.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잔잔하게 번지는 미소를 보고 나도 마음을 놓았다. 이번에도 성공이구나!
지금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동안에도 내 옆에는 몇 대의 라이카 M 카메라가 놓여있다. 가족 외 내가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다. 글을 작성하면서 괜히 라이카를 한번 만져본다. 흐‥ 좋다. 그러고는 갑자기 생각에 빠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동안 사회 초년생으로 바쁘게 살다가 내가 좋아하던 ‘사진’을 잊고 살았다. 그렇게 하나 있던 그저 그런 디지털카메라는 장롱으로 들어갔고 일회용 필름카메라로 담은 사진들도 앨범 깊숙이 들어갔다. 그러다 다시 사진에 눈을 뜬 건 아들이 태어나고부터였다. 대부분 아빠가 그러하겠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조금 좋은 카메라를 구매한다. 나도 우연히 TV에서 본 캐논 카메라 광고를 보고 무엇에 홀린 것처럼 백화점 매장에 가서 첫 DSLR 카메라를 구매했다.
정말 사진에 미친 사람처럼 업무 외 시간은 모두 사진과 카메라에 투자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뭔가 모를 아쉬움이 찾아왔다. 대학 때 일회용 필름카메라에서 느끼던 ‘진짜 사진’에 대한 욕망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이때부터 디지털카메라 대신 필름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꿈의 카메라’ 라이카와의 만남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사실 오래전 장비병에 걸린 순간 ‘라이카’란 카메라 브랜드가 내 마음속에 훅 들어왔다. 사진을 잘 찍고 싶어 구매한 매그넘 포토그래퍼의 사진집들을 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작가들 목에 걸려 있는 예쁜 카메라가 있었다. 바로 라이카 M이라는 카메라였다. 그런데 이 녀석이 가격이 얼마나 사악한지.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라이카 M을 위해 몇 년을 저축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시간이 흘러 기존에 구매했던 카메라를 모두 중고로 정리하고 저축을 더해서 라이카 M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라이카 덕분에 나는 인생이 크게 바뀌었다. 먼저 라이카를 사용하기 전과 후의 사진이 크게 달라졌다. 전의 사진들이 취미 사진이라면 후의 사진은 상업 작품을 해도 될 수 있을 만큼 좋아졌다. 첨단 기능이 있던 캐논이나 후지 카메라와 달리 라이카는 수동조작 카메라이다. 자연스레 한 컷을 찍더라도 느리지만 신중하게 찍게 되었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매일 찍는 컷 수는 줄었지만, 오히려 소장하고 싶은 사진의 개수는 늘게 된 것이다.
라이카 M과 만난 뒤로 취미로만 하던 사진이 일이 되었다. 드디어 기업 고객들을 대상으로 상업사진 촬영 서비스를 정식으로 시작한 것이다. 이제 돈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았다. 동시에 기존에 내가 진행하던 사업도 크게 성장했다. 덕분에 첫 라이카 M 카메라를 사용한 뒤 몇 대의 라이카 바디를 더 추가하게 되었다. 그중 라이카 MP와 라이카 M6는 필름카메라이다.
보통 상업사진을 하면 커다란 카메라를 이용해 연사로 사진을 찍는다. 혹시라도 실패할까 봐 여러 컷을 담고 B컷들을 버리는 형태로 촬영한다. 또 촬영 후 바로 후면 LCD를 켜고 의뢰인이 요청한 사진이 잘 찍혔는지 확인한다. 하지만 내 작업 방식은 조금 달랐다. 내 주력 서비스는 바로 필름 사진이기 때문이다. 줌렌즈가 없는 라이카의 특성상 라이카 MP, M6 두 대를 동시에 목에 걸고 서로 다른 렌즈를 이용해서 사진을 찍는다. 각 36장밖에 찍을 수 없으니 한 장 한 장 아껴서 찍어야 한다. 의뢰인이 원하는 콘셉트를 상상하고 카메라의 파인더를 보고 결과를 상상한다. 빛의 양을 느끼고 셔터스피드와 조리개를 조작해서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
1시간 30분 남짓 촬영하고 나서도 바로 결과를 볼 수 없다. 결과를 보려면 기다려야 한다. 이제부터도 할 일도 많다. 먼저 암실에서 현상을 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현상 용액의 비율 및 온도를 조정하고 또 현상 시간을 설정한다. 현상이 다 끝나면 한 장 한 장 필름 카트리지에 넣고 스캔을 해야 한다. 혹시라도 소중한 사진에 먼지라도 들어갈까 봐 블로어로 열심히 먼지를 불어 내고 스캔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디지털 툴로 후보정을 하면 비로소 의뢰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사진이 완성된다.
100% 디지털로 작업하면 그냥 찍고 바로 후보정을 하면 끝이다. 하지만 조금 느리더라도 마치 음식처럼 사진에도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손맛으로 정성을 더한 사진은 참 맛깔나다.
나는 라이카 카메라와 사진 그리고 일상 이야기를 하는 블로그를 운영한다. 오랫동안 한 우물만 파서 그런지 라이카 관련 검색을 하면 늘 내 블로그가 나온다. 그러다 보니 라이카 유저들 사이에서 나는 지름신 대마왕이다. 댓글로 질문도 많이 하지만 다수의 사람은 내 덕분에 라이카에 입문해서 느리게 사진을 찍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 준다. 그럼 행복하다.
오늘도 어떤 이의 댓글을 읽으며 미소 지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스마트폰과 최신형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서 권태기를 느꼈습니다. 쉽게 사진을 찍어서 그런지 나중에 다시 보지 않게 되더군요. 그러다 Allan 님의 블로그를 보게 되었고 어쩌다 라이카 필름카메라까지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셔터를 누르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고 결과를 보려면 며칠을 기다려야 하지만, 매번 결과물에 만족하게 됩니다. 다시 사진의 즐거움을 찾아 너무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그의 댓글을 읽으며 나도 행복이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