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속 과학읽기

블랙박스 발명한
항공 과학자의 도시

호주 멜버른

유럽풍 건물과 트램, 그래피티 골목은 문화예술의 고장 호주 멜버른의 상징이다.
멜버른은 ‘블랙박스’의 사연을 간직한 도시이기도 하다.
차량에서 쉽게 발견하는 블랙박스는 이 도시의 거리에서 더욱 각별하다.
멜버른

30년간 비행기 연구
‘데이비드 워렌’

일상에서 사용되는 ‘블랙박스’의 기원이 된 곳은 어디일까. 자동차 사고 규명의 필수품이 된 블랙박스는 항공기 시스템에서 출발했고, 호주의 과학자 데이비드 워렌에 의해 발명됐다. 데이비드 워렌은 멜버른의 국방과학기술기구에서 30여 년간 항공 연구자로 근무하며 블랙박스를 개발했다.
아홉 살 때 부친을 비행기 추락사고로 잃은 그는 1953년 항공전문가로 여객기 사고를 조사하며 조종실 음성 녹음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녹음과 비행기록까지 저장되는 블랙박스를 완성한 것은 1958년 멜버른에서의 일이다. 강철철사에 음성을 4시간까지 기록할 수 있는 비행기록 장치의 시제품도 만들어낸다. 요즘 대부분의 차량용 블랙박스와 달리 발명 당시 블랙박스는 오렌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1960년 호주 법원은 세계 최초로 모든 호주 비행기에 블랙박스 설치를 의무화 한다. 호주 항공사 콴타스는 ‘멜버른 항공 과학자’의 공로를 기려 자사의 A380기 한 대를 ‘데이비드 워렌호’로 명명하기도 했다. 항공기 블랙박스 외부에는 기록손상을 막기 위해 ‘Do not open’이라고 쓰여 있다. 2010년 데이비드 워렌이 사망했을 때도 그의 관에는 ‘Flight recorder inventor, Do not open(블랙박스 발명가, 열지 마시오)’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호주 최초 기차역과
트램의 도시

트램의 도시, 멜버른

골목투어의 고장, 멜버른

멜버른은 유럽향이 묻어나는 도시다. 1854년 세워진 호주 최초의 플린더스 스트리트 기차역 주변에는 옛 마차들이 한가롭게 오간다. 도심을 가르는 야라강 북쪽이 플린더스 스트리트 역, 세인트 패트릭 성당, 퀸 빅토리아 마켓 등 오래된 공간들로 채워진다면 강의 남쪽은 아트센터, 국립미술관 등 현대 건축물들이 도시의 문화적 감성을 더한다.
멜버른은 호주에서 유일하게 트램이 오가는 도시다. 느릿느릿 달리는 자줏빛 트램과 마주치면 유럽의 외딴 도시에 서 있는 듯하다. 때로는 멋스럽게, 때로는 형형색색의 광고로 단장된 트램은 도시의 색깔을 덧씌우고 살찌우는 매개다. 교통체증으로 트램을 없애자는 의견이 분분했을 때에도 멜버른 시민들은 완강하게 옛 탈 것을 지켜냈다고 한다. 그 고집스런 길이 도시의 숨통이자 상징이 됐다. 도로의 중앙차로는 오직 트램만이 다니는 전용차선이다. 트램들은 유료와 무료 트램이 공존하며 도심을 순환하는 무료 트램은 자줏빛 색깔에 투박한 옛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피티, 아케이드로
단장된 골목들

멜버른은 호주에서 가장 많은 극장과 갤러리를 보유한 문화 예술의 도시이며 미식가의 도시, 골목투어의 고장으로 명성 높다. 벽화로 치장된 멜버른의 골목들은 뉴욕 브룩클린의 뒷골목을 연상시킨다. 어느 골목을 기웃거려도 가벼운 산책은 기분 좋은 상념으로 이어진다. 플린더스 스트리트의 ‘호시어 레인’은 멜버른을 대표하는 그래피티 골목으로 벽화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모습은 흔한 광경이 됐다. 무분별해 보이는 벽화에는 작가들의 사연과 약속이 담겨있으며 그래피티의 속사정을 설명해주는 투어 프로그램이 따로 마련돼 있다.
멜버른
디그레이브스와 센터 플레이스 일대의 뒷골목들은 멜버른의 골목문화가 압축돼 있다. 높은 천장과 모자이크 바닥이 인상적인 블록 아케이드는 문화재로 지정돼 있고, 1869년 세워진 로얄 아케이드는 멜버른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골목길에서 만나는 수제 초콜릿 가게, 빈티지 숍 등에서도 풍미가 전해진다. 어둠이 내리고 상점들이 문을 닫으면 골목들은 다시 그래피티로 단장되며 도시의 이면을 채색한다.

영국식 정원과
그레이트 오션로드

멜버른의 도심 건물 뒤로는 완연한 녹색지대다. ‘정원의 도시’로도 불리는 멜버른은 10여 분만 걸어서 이동하면 푸른 숲과 새소리가 완연하다. 킹스 도메인은 야라 강을 끼고 남쪽으로 넓게 형성된 공원지대로 공원 안에는 1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야외음악당이 들어서 있다. 킹스 도메인에 접한 로열 보타닉 가든은 1846년 문을 열었으며 36만 ha의 넓은 부지에 영국식 정원 양식을 띠고 있다. 호주를 발견한 캡틴 쿡의 오두막이 있는 피츠로이 정원 등도 깊고 단아한 정취를 자랑한다.
도시를 벗어나 조우하는 멜버른의 근교는 이채로운 풍경들로 채워진다. 서쪽 그레이트 오션로드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에 단골로 등장하는 곳이다. 1차 세계대전을 끝낸 퇴역군인들의 땀방울이 깃든 길은 바람과 바다가 빚어낸 대자연의 신비를 간직한 채 약 200km 뻗어 있다. 기이한 형상을 뽐내는 바위들은 청아한 파도 소리와 함께 한다.
멜버른 동북쪽의 야라 밸리에는 60여 개의 와이너리가 들어선 포도밭 세상이다. 차창에 매달린 채 달리는 단데농의 증기기관차 역시 멜버른 근교의 살가운 추억거리다.
정원의 도시로 불리는 멜버른

그레이트 오션로드를 걷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