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

한 권의 책과

한 달 동안 살아보기

여행사진
‘한 달 살기’라는 여행 스타일을 알게 되었을 때, 처음 배낭여행을 계획했던 날처럼 설레었던 기억이 납니다. 떠나기 전부터 이곳저곳을 다녀야 하는 일정에 머리를 지끈거릴 일 없이, 어느 집 문을 열고 짐을 풀고는 그대로 한 달을 지내다 오면 되는 여행. 허둥지둥 남들 다 가보는 곳에 가서 ‘인증샷’만 찍고 오는 날보다는, 골목길의 고양이나 동네 노을 사진을 더 자주 찍게 되는 여행. 그렇게 깊고 풍부한 여행에 점점 빠져들 무렵, 저는 또 다른 ‘한 달 살기’의 기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미니멀리즘’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적당히 큰 집과 적당히 큰 책장을 가지고 살아가던 저는 어느 날 미니멀리즘을 접하고 모든 것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풍족하게 살면서도 왜 항상 답답했는지에 대한 원인을 알고 나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짐을 차차 정리하고 집을 반 토막 크기로 줄여나갔더니 돈과 시간이 모이기 시작하더군요. 급기야 남편과 긴 상의 끝에 직장도 정리하고 집을 2평 반으로 줄여버렸어요. 그렇게 저흰 3년 동안 초소형 집에서 매일 ‘한 달 살기’를 하며 유럽 곳곳에서 여행하듯 살았습니다.
그렇게 집을 아주 작게 줄였더니 책장의 책도 아주 조금만 남았어요. 작은 집에 정말 남기고 싶은 책만 골라냈더니 딱 세 권으로 추려지더군요. 세 권만 꽂힌 책장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보단 오히려 멋져 보였습니다. 읽는 동안 행복했고 감동받았고 제게 힘이 되어준, 정말 소중한 책들만 남겨두었으니까요. 어릴 적 용돈을 아끼고 아껴 구매한 책, 코팅까지 해서 소중하게 읽었던 책들이 꽂힌 책장을 보는 것만 같더군요.
여행가방
그러고 보니 어릴 적엔 책이 꽤 귀했기 때문에 같은 책을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근래 들어서는 한 책을 두 번 이상 읽었던 적이 없었어요. 책 한 권 사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고, 한 책을 여러 번 읽는 것보다는 더 많은 책을 읽는 편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이젠 제 책장은 너무도 작아져 버렸고, 유럽 곳곳을 계속해서 돌아다니다 보니 새로운 책을 사는 일도 어려워져버렸어요.
‘그럼, 책에서 한 달을 살아보면 어떨까? 그때 받았던 책 한 권의 소중함을 책에서 한 달 살기를 통해 다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날부터 전 그리스의 한 해변에서, 독일의 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슬로베니아의 한 농장에서 책 한 권을 한 달 내내 읽고 또 읽었습니다. 하루에 한두 시간씩 틈이 날 때마다 책을 펼치면, 여행지를 벗어나 책 속의 삶 한가운데에 또 다른 여행을 떠나온 것만 같았어요. 같은 공원을 몇 번이고 산책하고 동네 골목길을 외울 정도가 되는, ‘한 달 살기’ 여행을요.
책 한 권을 한 달 내내 읽고 또 읽는 일은 솔직히 조금 지루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너무도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책을 읽으며 변화하고 동화되는 제 모습이 신기했습니다. 어느 책이건 한 달 동안 계속해서 읽고 사유하고 질문하고 상상하다 보면, 인생의 어느 한 부분은 반드시 바뀌게 되어 있어요. 누구도 시도해본 적 없었던 특이한 방식의 서점을 구상하고 운영하는 작가의 이야기에서 용기를 받아 제가 그간 꿈만 꿔 오던 일들을 하나씩 시도해보는 제 모습. 타인의 입장을 상상하기만을 벗어나 직접 살아본 작가의 삶을 계속해서 들으며 그동안 보려고 하지 않았던 수많은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하기 시작한 제 모습. 대부분이 선택하지 않는 특별한 삶도 이 또한 배움이고 성장이라고 말하는 집을 자꾸 기웃거리며 우리 또한 매일이 배움이라는 걸 깨닫는 제 모습. 한 달이 지나고 나면 이런 제 모습들이 어느새 저 삶 안에 성큼 들어와 있었습니다.
책
책을 여러 번 읽고 여러 번 사유하는 일은 정말 책에서 살아가는 일이에요. 한 번의 깊고 풍부한 여행이 자신을 바꾸듯, 한 권의 깊고 풍부한 책도 분명 저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었어요. ‘한 달 동안 작가가 되어 살아보기’를 마친 후의 저는 ‘한 달 살기 여행’을 막 마친 사람처럼 달뜬 얼굴을 하고 책을 빠져 나왔습니다.
책에서 한 달 살기를 1년 정도 반복하고 난 후, 저는 이제 책을 정말 여행지로 바라보게 되었어요. 이젠 책을 고를 때 ‘어떤 책을 읽어 볼까’가 아닌 ‘어떤 책에서 살아볼까’로 바라보게 됩니다. 고민 끝에 고른 아름다운 여행지에서의 휴가를 계획하는 설레는 밤처럼, 이번엔 어떤 사람이 되어 돌아올까 하고 눈을 반짝이며 책장 앞에 서는 것이죠. 그럼 이번 여름, 어떤 삶에서 한 달을 살아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