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역법과 달력

세종, 달력을 통일하다

오늘날에는 미신이라 치부할지 몰라도 전통시대 달력에는 길흉일이라 하여 어떤 날에 무엇을 하면 좋은지 나쁜지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조선 초기까지도 달력마다 정보가 달랐기에 큰 혼란이 있었다. 예를 들어 부모가 돌아가시면 좋은 날을 택일하여 장사(葬事)를 지내야 하는데 달력마다 그에 대한 정보가 달랐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정해진 기일 안에 장사를 지내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더욱이 길흉일에 대한 풍수설이 다양해서 심하게는 한 달 동안 장사지내기 좋은 날이 하루도 없는 경우도 있었다.
양반 사대부들이 풍수설만 믿고 10년이 되도록 부모의 장례를 치루지 못한 일이 생기자 태종이 칼을 빼들었다. 태종은 부왕인 태조의 장사를 모범적으로 5개월 만에 지내고 양반 사대부들도 장례 기한을 3개월 이내에 치르도록 제한했다.
그러나 법으로 강제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태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세종은 법이 아닌 여러 달력들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세종은 1년 동안 좋지 않은 날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왕이었다. 결국 백성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달력들을 정리하여 하나의 달력 체제로 만들고 여기에 길흉일을 통일시켰다. 이제 백성들은 달력마다 서로 다른 길흉일 때문에 혼란을 겪지 않아도 되었다.

역법의 발전

세종대왕
조선은 개국과 함께 천문학을 빌어 왕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는데 정확한 역법을 사용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조선 건국 후 역법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고려 말에 들어온 수시력과 그전부터 사용했던 선명력, 그리고 고려 말에 다시 명나라에서 들어온 대통력까지 섞어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일월오성의 운행을 계산하여 달력을 만드는 역법의 수준은 여전히 고려 말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역법은 하루아침에 수준이 높아질 수 없는 매우 복잡하고 정밀한 과학이었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입증할 유용한 수단이었던 천문학은 국가의 기틀이 잡히면서 더욱 중요해졌다. 그러나 건국 초부터 조선은 명과 달력에 차이가 있어 논란이 있었다. 태종은 명과 조선의 달력이 서로 날짜가 맞지 않자 이를 맡은 서운관 관리 조의구를 의금부에 가두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세종대에도 이어졌지만 천문학을 중시한 세종의 노력으로 조선은 수시력과 대통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아가 조선의 경위도에 맞는 새로운 역법을 고안해 낼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세종은 선왕인 태종의 뜻을 이어 달력을 천문 현상과 합치되도록 했다. 1430년(세종 12) 8월 3일에 세종은 여러 신하들 앞에서 “천문을 계산하는 일은 전심전력해야 할 수 있다. 일식과 월식, 별의 움직임 등은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인데 당의 선명력을 사용하여 그간 착오가 많이 있었다. 이제 정초가 수시력법을 연구하여 밝혀낸 뒤로는 달력을 만드는 법이 많이 바로잡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일월식 계산이 계속 오차가 발생하자 세종은 “훗날 이를 제대로 해줄 인재를 기다리겠노라”며 역법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자주적인 역법의 실현

정확한 달력을 만들고자 하는 세종의 노력은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세종은 1433년(세종 15)에 신하들에게 명나라의 대통력을 연구해 역법의 원리를 완전히 소화하도록 지시했다. 교식(일·월식의 계산법)과 오성(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만의 입성(역법 계산에 필요한 천문상수들을 적어 놓은 표)이 없다 하여 정인지, 정초, 정흠지 등에게 새로 계산하게 했다. 이를 바탕으로 명나라 원통이 편찬한 『대통통궤(大統通軌)』의 오류를 바로잡아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편찬했다. 뒤이어 이순지와 김담 등에게 이슬람력인 회회력을 바탕으로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교정한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만들게 했다.
당시 역법 연구에서 주도적인 활동을 한 사람은 이순지와 김담이었다. 이들은 사용하던 역법들이 우리나라 실정과 맞지 않자 근본적인 개선책을 찾고자 고군분투했다. 이를 위해 이순지와 김담은 당시 역법 이론들을 전면적으로 분석하고 검토하였다. 또한 세종은 수도 한양뿐 아니라 백두산, 강화도 마니산, 한라산 등 주요 지점들에 달력 편찬을 맡은 관리들을 파견하여 북극고도를 측정하였다.
『칠정산내외편』의 편찬으로 조선의 역법은 완성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독자적인 역 계산을 바탕으로 한 달력의 제작이 힘들어지기도 했다. 선조는 조선에 온 명군이 명나라 허락 없이 조선이 만든 달력을 알게 될까 두려워했다. 선조는 신하들에게 “제후 나라에 어찌 두 가지 역서가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에서 개별적으로 역서를 만드는 것은 매우 떳떳하지 못한 일이다. 중국 조정에서 알고 힐문하여 죄를 가한다면 답변할 말이 없을 것이다”라며 달력 만드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때문에 『칠정산내외편』 이후 자주적인 역법에 따른 달력의 제작은 임란과 함께 중단될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칠정산법은 1653년(효종 4)에 시헌력으로 개력된 이후에도 역 계산에서 계속 활용되었다.

정치가 역법의 발전을 이끌다

우리의 전통 달력은 음양력을 사용했다. 지구의 자전주기를 1일, 공전주기를 1년이라 하고, 달의 삭망주기를 음력의 한 달이라 정했다. 그러나 서양력의 한 달 주기는 천체운동의 주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편의상 1년을 12로 불균하게 나뉘어 놨을 뿐이다. ‘역’에서의 문제는 1년, 1월, 1일의 시간 단위가 정배수로 되어 있지 않은 데 있었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역법이 고안되었고 개력을 거듭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과거 한국과 일본은 중국에서 반포한 달력을 받아 사용하거나 중국 역법에 따른 달력을 사용하였다. 이는 시간이 곧 정치적 권위의 상징이었음을 말해준다. 중국에서 역()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용된 것은 진나라 진시황 26년(B.C 221)부터였다.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날짜의 통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중국력이 사용된 것은 삼국시대부터였다. 고구려가 당의 무인력, 백제는 송의 원가력, 신라는 당의 인덕력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통일신라 때는 당의 선명력을 도입하여 사용하였다. 선명력은 고려 충선왕대에 원의 수시력으로 바꿀 때까지 무려 500년 가까이 사용되었다.
당의 선명력은 9세기경 발해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으며 일본은 17세기 후반까지 800년간 선명력을 사용했다. 일본은 서양천문학이 반영된 시헌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시헌력 이전의 역법인 수시력을 정향력이라는 이름으로 태양력으로 바뀔 때까지 오랜 기간 사용했다. 17세기에 조선이 최신의 역법인 시헌력을 수용하기 위해 수십 년간 노력한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일본과 달리 조선이 과학적으로 앞선 시헌력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통일된 중앙집권적 왕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국가가 독점한 달력

경진년대통력

옛 사람들이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약속과 노동 시간 때문만은 아니었다. 종교적인 이유든 세속적인 이유든 좋은 날을 받는 이른바 택일이라는 것이 더 중요했다. 택일은 국가 통치자나 관리들뿐만 아니라 농부와 상인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제사를 올리거나 중요한 사업을 시작할 때 좋은 날은 언제인가 하는 선택의 지침을 얻기 위해 초자연적인 자료에 도움을 청했고 그것이 달력에 반영되어 정착화 되었다.
전근대 한국은 시간과 달력을 국가 통치 질서와 관련지어 매우 중요시했다. 이른바 시간을 기록해 놓은 ‘달력’을 국가가 독점하고 있었다.
달력은 전통시대에는 역서(曆書) 혹은 월력(月曆), 책력(冊曆)이라는 명칭으로 다양하게 지칭되었다. 특히 책의 형태로 제작되어 책력이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다. 책력은 오늘날처럼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나열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 필요한 농경생활의 지침서로서 또는 길흉화복에 따른 관습적 일상의 지침서로서 활용되었다. 책이라 부를 정도로 다양한 정보가 많았던 것이다.
조선전기에 1만 부 정도 발행되던 책력은 조선후기에 30만 부 이상 발행되었다. 30만 부라고 해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책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 농경사회에서 24절기에 맞추어 제작된 책력은 요긴하고 흔치 않게 귀중한 대접을 받는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