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이성계와 고구려 천문도

사라진 고구려 천문도의 등장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무장 출신에다가 특별한 혈통도 아니었으니, 왕으로서의 권위가 잘 세워지지 않았다. 게다가 백성들은 조선의 백성이기 보단 고려 백성이라는 인식이 더 컸다. 예나 지금이나 민심이 천심인 법이다. 조선을 세운 건국 세력들은 왕인 이성계를 백성들이 인정하는 왕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성계
조선왕조가 오랫동안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권위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이성계가 ‘천명(天命)’을 받은 인물임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천명’이란 글자 그대로 하늘에서 부여받은 명령 또는 운명을 뜻한다. 역사적으로 천명은 이른바 ‘방벌(放伐)’ 또는 ‘선양(禪讓)’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방벌이란 난폭한 왕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을 의미하며, 선양은 덕이 있는 이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것을 말한다. 흔히 역사적으로 “이성계가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켰다”라고 평가하는데, 이는 고려 왕 씨 대신 이 씨로 성()을 바꾸고 천명을 다시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역성혁명은 역사적으로 새 왕조의 건국을 정당화함과 동시에 왕조 교체 이론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이때 조선이 천명을 받은 왕조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용된 것이 바로 ‘고구려 천문도’였다
잃어버린 고구려 천문도가 수백 년 만에 발견된 사실을 공식적으로 기록한 인물은 조선 건국 세력의 한 사람인 권근(1352~1409)이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이 건국된 지 몇 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희소식이 날아들었다고 한다. 8백여 년 전 중국 수·당과의 전쟁으로 사라진 고구려 천문도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런데 이 천문도에 깃들여져 있는 사연이 묘하다. 권근에 따르면 “돌로 만든 천문도가 옛날 고구려 평양성에 있었는데 전쟁으로 강물에 빠져버렸고, 세월이 흘러 남아 있던 인쇄본까지도 없어졌다. 이에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시자 어떤 이가 한 본을 올리므로, 이를 귀중히 여기고 서운관에 명하여 돌에다 다시 새기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반하는 민심을 수습하려 절치부심하던 이성계는 고구려 천문도를 보자 뛸 뜻이 기뻐하였다. 이 장면을 권근은 ‘전하보중지(殿下寶重之)’라고 표현했다. 해석하면 국왕 즉 이성계가 이 천문도를 보물처럼 귀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고구려 천문도를 손에 넣은 이성계는 천문관서인 서운관의 관원에게 고구려 천문도를 당장 돌에다 새기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조선 태조 4년인 1395년 12월에 석각천문도가 완성되었고, 그 이름이 바로 <천상열차분야지도>이다. 295개 별자리와 1,467개의 별을 그려 넣은 <천상열차분야지도>는 1241년에 제작된 중국 남송시대에 만든 <순우천문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천문도이다.
그런데 수백 년 동안 사라졌던 고구려 천문도가 이성계 앞에 나타난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일까. 역사의 기록처럼 천문도가 우연히 발견된 것뿐일까. 고구려 천문도의 발견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성계가 천명을 받은 군주라는 하늘의 뜻을 나타낸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백성들에게 왕조의 정통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고구려 천문도 보다 더 좋은 것은 없었다. 이 시대 천문도는 과학적인 의미 외에도 정치적 의미가 가미되어 있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서문을 쓴 권근은 고려왕조의 충신으로 유명한 포은 정몽주의 제자로 그 또한 원래는 고려왕조의 충신이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권근을 자신의 신하로 삼고 싶었다. 결국 권근은 이성계의 삼고초려에 감명을 받아 조선 왕조의 기틀을 세우는 데 공헌하였다.

‘천상열차분야지도’와 중성의 수정

태조 4년에 완성된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천문도를 기본으로 했지만,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천문도를 본 천문관리들은 왕에게 고구려 천문도를 그대로 돌에다 새기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의견을 내었다. 이른바 세차 운동에 의해 별 위치가 고구려 때와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구는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진 상태에서 회전하고 있어 세차운동이 발생하는데, 1년이 지나면 관측별은 동쪽으로 약간 이동하게 된다. 때문에 관측의 기준이 되는 중성(中星) 즉 일몰과 일출 때 하늘의 자오선을 통과하는 별의 위치가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게 된다. 그러므로 계절에 따라 관측되는 중성의 위치가 바뀐 오차 부분을 새롭게 관측하여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하늘의 정남쪽을 다른 말로 남쪽 하늘 자오선 위에 위치한다고 하는데, 이를 천문학에서 남중이라 한다. 중성이란 남중하는 별이라는 뜻이다. 해가 질 때와 뜰 때 하늘 정남쪽에 보이는 별, 즉 중성은 천문도 제작에서 매우 중요했다. 결국 서운관은 고구려 천문도 스타일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남중하는 별자리만을 수정하는 것을 택했다. 태조 때 만들어진 <천상열차분야지도>은 류방택이라는 걸출한 천문학자가 중성을 수정해 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특히 24절기 시각이 들어 있는 날짜에 해가 질 때인 혼각(昏刻)과 해가 뜰 때인 효각(曉刻)에 남중하는 별을 시간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것을 표로 나타내 정리한 책을 『중성기(中星紀)』라고 한다. 혼각과 효각은 오늘날의 박명 시각과 비슷한 개념이다. 1654년 이전에는 하루를 100각()으로 나누어 해가 진 뒤 2.5각이 되는 시각을 혼각이라 하고, 해가 뜨기 전 2.5각을 효각이라고 하였다. 또한 혼각과 효각 사이를 야분(夜分)이라고 하며, 이 시간을 5등분하여 각각 1경(), 2경, 3경, 4경, 5경이라고 하였다.
류방택은 매 경이 되는 시각에 남중하는 시간권이 어떤 28수(宿)에 들어가며 그 수거성(宿距星)과 몇 도의 적경 차이가 있는지를 계산하여 표로 작성해 놓았다. 이를 통해 어떤 절기 무렵 밤 시각에 어떤 별이 남중하는지를 측정하여 시간을 정할 수 있었다.
류방택에 의해 새로운 『중성기』가 완성되어 왕좌에 헌상된 것은 수년이 흐른 을해년(1395) 6월이었다. 옛 고구려 천문도에서는 입춘에 묘수(卯宿)라는 별이 황혼 때 남중했지만, 조선 초에는 세차현상에 의해 위수(胃宿)라는 별이 남중하였다. 24절기마다 남중하는 별이 달랐으므로 류방택은 이를 모두 수정하여 천상열차분야지도에 반영하였다, 고구려 옛 천문도에 등장하는 별자리를 그대로 사용했지만, 당시 남중하는 별, 즉 중성과 일치하도록 수정한 것이다.
태조 때에 이어 세종 때에도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이름의 석각천문도가 제작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석각천문도는 중성의 위치만 수정된 태조석각본과는 달리 28수 거성과 12차 교궁수도 등이 추가로 수정되어 완전히 업그레이드된 천문도였다. 따라서 태조본과 비교하여 ‘신법천문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신법천문도는 태조석각본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성좌의 위치가 완전히 수정된 새로운 천문도였으며, 조선 천문학 발전의 결과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