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조선의 하늘을 원한 세종

세종, 첨성대를 세우다

첨성대
세종은 즉위한지 2년 뒤인 1420년에 경복궁에 첨성대(瞻星臺)라는 이름의 관측대를 세웠다. 얼핏 첨성대라고 하면 선덕여왕 때 만든 경주에 있는 첨성대가 떠오른다. 우리 역사에서 경주 첨성대 외에도 평양에 첨성대가 있었다는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이 있다. 천문 관측대는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와 신라,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설치되었다.
세종은 첨성대를 만들기 위해 천문관 이무림에게 천문과 산수에 정밀한 사람을 뽑아 올리라고 했다. 천문 관측은 사실 밤낮 할 것 없이 24시간 하늘을 지켜보는 것이 주된 일이다. 그러다 보니 천문가들의 고충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세종은 추천받은 천문가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천문관원이었던 윤사웅은 태종대에 관상감정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다가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전라도 장흥에 낙향해있었다. 천문학 발전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렸던 세종이었다. 세종은 말을 타고서라도 하루 만에 서울로 올라오라 할 정도로 윤사웅을 급히 불러 들였다.

천문관 윤사웅이

실력이 있다고 들었다.

오늘 안으로 그를 어서 불러 들여라.

전하, 그는 지금

궁궐에 없고 고향으로

낙향해 있습니다.

고향이 어딘가.

전라도 장흥입니다

역마를 타고

올라오라 하라.

내일 중으로

내가 만나봐야겠다.

진용이 갖춰지자 세종은 이들에게 첨성대에서 천문 관측하는 일을 시켰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신하들이 열심히 일하는 지 안 하는지 몰래 지켜보는 일은 세종의 전매특허였다. 세종은 몰래 첨성대에 행차하여 천문관들이 일을 잘 하는지 지켜보곤 했다.
윤사웅이 밤을 새며 일하는 것을 보게 된 세종은 그에게 술을 따라주며 격려했다. 반면 천문관 박유신이 자기 당번 날에도 근무를 서지 않으며 근태를 하자 그를 옥에 가두고 여러 차례 형벌까지 내렸다. 세종은 그것도 성에 안차 박유신을 멀리 거제도로 귀양 보내버리고는 끝내 부르지 않았다. 천문 관측의 일이 실로 가볍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길한 혜성이 관측되다

일식
혜성
조선시대에 혜성의 등장은 불길한 징조 중 하나였다. 일식도 마찬가지였다. 낮에 일식이 일어나면 변괴가 일어난다고 믿었다. 혜성이든 일식이든 최종적으로는 하늘의 꾸지람이라 여겼다. 혜성이나 일식을 국왕이 나서서 소멸시키지 않으면 국가의 안위를 위협할 재앙이 나타난다고 믿은 것이다.
혜성이 관측되면 왕은 하늘을 향해 스스로를 자책하며 덕을 쌓아 재앙을 소멸시켜야 했다. 국왕은 어찌되었든 하늘의 꾸지람에 응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오늘 날의 과학 지식으로는 터무니없는 것이지만, 우리 옛날 조상들은 그렇게 믿었다. 세종 2년인 1420년 10월 15일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5일 뒤 혜성이 관측되었다. 보고를 받은 세종이 몹시 놀라 혜성을 관측하러 첨성대에 올랐다. 1418년 8월 10일, 스물 둘이라는 패기 가득한 나이에 즉위하여 국가경영의 대권을 잡은 지 불과 2년 뒤의 일이었다.
본인이 자처한 것은 아니지만, 형님인 양녕대군 대신 왕위에 오른 것이 부담이던 상황에서 혜성의 등장은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이 혜성은 사라지지 않고 하늘에 떠 있었다. 세종은 모든 정무를 멈추었다. 반찬을 줄이며 전국에 사면령을 내렸다. 이후 세종은 매일 첨성대에 올랐다. 왕으로서 하늘의 인정을 받느냐 못 받느냐의 문제였다. 다행히 혜성은 7일 후에 사라졌다. 세종은 “아! 형 대신 왕위에 오른 나를 하늘이 인정하셨구나”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혜성이 관측된 이후로 천문관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매일 매일 첨성대에서 숙직하며 혜성의 움직임을 관측했다. 윤사웅을 비롯하여 천문관들은 세종이 매일 찾아 찾아오는 통에 잠시도 쉴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후 혜성이 사라지자 세종은 뛸 뜻이 기뻤다. 세종은 천문관들의 수고를 잊지 않았으며, 이들에 높은 벼슬을 내리라는 깜짝 놀랄만한 특명을 내렸다.

한라산에서 노인성을 관측하다

한라산
1425년(세종 7년) 5월 7일 밤, 세종은 첨성대에 올라 윤사웅에게 “노인성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천문관 윤사웅은 남쪽 하늘을 가리키며 “전하, 남극노인성은 저기에 있사온데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남극에 가깝고 높이 있사온데 제주 한라산이나 백두산 정상에 올라가면 보인다 하오나, 살펴볼 길이 없습니다”라고 전했다.
이 대화에서 나온 노인성은 남극성으로 오늘날 ‘카노푸스(Canopus)’라고 불리며 적위 -52정도 남반구에 위치해 있다. 제주 서귀포, 해담 등 남해 연안에서만 볼 수 있는 별이다 보니 예로 부터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수성(壽星)이자 길성(吉星)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노인성이 나타나면 타라가 평안해진다고 믿었다.
세종은 노인성이 소문처럼 제주도와 백두산에서 볼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노인성은 관측되지 않았다. 4년 뒤 한라산으로 파견되었던 윤사웅은 노인성 관측에 성공했다. 윤사웅은 춘분에는 보지 못했으나 추분에는 바다가 맑고 하늘이 개여 노인성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관측한 노인성을 그림으로 그려 세종에게 바쳤다.

사웅아.

말로만 듣던 노인성을

정말 눈으로

확인했단 말이냐.

네 전하.

제가 직접 눈으로다

보고 이렇게

그려왔습니다.

윤사웅이 노인성을 관측했다는 말에 세종은 뛸 듯이 기뻤다. 왕의 신분이 아니라면, 한라산으로 달려가고 싶은 맘이었다. 세종은 노인성에 대해 자세히 묻고는 수고했다며 술을 따라주었고 윤사웅의 벼슬을 올려주었다. 노인성은 비록 백두산에서는 관측되지 않는 별이었지만, 제주도에서는 특정 시기에 볼 수 있는 별이었다.
하늘을 수놓은 천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세종과 그 뒤를 따르던 신하들. 세종 시대의 천문학 발전과 만들어진 많은 관측기구는 조선의 국격을 높이기도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국가의 안위와 나라의 평안을 위한 것이었다. 어느 임금도 갖지 않은 하늘에 대한 세종의 호기심은 백성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해주고 싶은 애민정신의 발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