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백제왕은 순금,

신라왕은 금은 합금을
선호했다?

백제와 신라의 유물
백제와 신라의 왕릉,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을 분석하면 제목에 대한 답은 긍정이 된다. 우선 1971년 배수로 공사 도중 모습을 드러낸 백제 무령왕(재위 501~523년)의 부부 합장묘인 무령왕릉을 보자. 무령왕은 525년에, 왕비는 4년 뒤인 529년에 안장되었다. 이때 둘은 금제 장신구를 착장한 모습이었다.

99.99 %에 도전한 백제 장인들

2007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장신구 중 29건(64점)을 비파괴 기법으로 분석한 결과 주목할 만한 점을 발견했다. 금제 장신구 중 상당수가 순도 24 K 즉 99.99 %에 근접한다는 점이다. 그중 무령왕의 머리맡에서 확인된 금제 관장식의 경우, 금세선의 금 함유량은 약 98 %에서 99 %(23.5~23.8 K)에 달했다. 금귀고리는 순도가 무려 98~99.84 %(23.5~24 K) 정도로 확인되었다. 무령왕비의 금제 장신구는 어떨까. 왕비의 귀걸이는 98~99.8 %(23.5~24 K)의 순도를 자랑했으며 아홉 마디 목걸이는 98.9 %에서 99.1 %(23.7~23.8 K) 정도 되었다. 또 왕비의 ‘굽은 옥에 씌운 금 모자(금모곡옥)’ 등은 99.87 % 즉 상당수가 24 K로 이루어져 있었다. 왕의 머리 뒷부분에 꽂혀있던 금뒤꽂이를 비롯한 각종 장식들은 90.5~96.5 % 정도였다. 종합해보면 왕과 왕비가 직접 착용했던 유물은 99.99 %에 가까운 순금이며, 단순한 부장품은 상대적으로 순도가 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 출토품

무령왕비의 목걸이와 치장용품

무령왕 부부의 단순한 부장품1
무령왕 부부의 단순한 부장품2

금은 합금을 선호한 신라

그렇다면 무령왕과 비슷한 시기를 보냈던 신라의 국왕들은 어땠을까. 6점의 금관 등 신라의 금제 유물 65건(115점)을 X선 형광분석기 등의 기법을 이용해 분석한 결과는 흥미로웠다. 경주 보문동 합장분 중 굴식돌방무덤(6세기 전반)에서 출토된 금제 귀고리 한 쌍의 순도는 92.32~97.76 % 정도였다. 비슷한 시기인 무령왕릉의 유물보다 낮은 수치다. 같은 합장분 중 돌무지 덧널무덤에서 출토된 귀고리는 금 71 %, 은 28 % 정도의 금은 합금이었다. 금관 역시 일정량의 은이 함유되어 순금과는 거리가 멀었다.
국보 순금제 귀고리 1쌍

관의 세움장식 순도를 기준으로 보자면, 금관 6점의 금 함유량은 80~89 % 선이다. 동(89.2 %)-황남대총 북분(86.2 %)-금관총(85.4 %)-천마총(83.5 %)-금령총(82.8 %)-서봉총(80.3 %) 순이다. 순도로 따지면 21.1 K(교동)~19.3 K(서봉총)정도다. 반면 은 함유량은 10.9(교동)~18.8 %(서봉총) 사이며, 관테(둥근 밑동)의 금 함유량 역시 차이가 있다. 이는 88.1(교동)~81.4 %(서봉총)였다. 달개(영락)은 88.2(교동)~79.3 %(서봉총), 금실은 85.8(황남대총)~77.9 %(서봉총) 사이의 함유량을 보였다. 금관과 함께 출토되었던 새 모양의 관 장식은 금 함유량이 82.9(천마총)에서 87.1(금관총) % 정도 되었다.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은 대략 75~85 %, 목걸이는 71.4~98.3 %로 비율이 다양했다.
허리띠와 허리띠 장식

개목걸이도 황금을 썼는데

신라의 금제 유물은 5세기 초부터 6세기 초반까지 100여 년 간 대유행이었다. 중세 아랍의 지리학자인 알 이드리시(1099~1166년)는 “신라에서는 개의 사슬이나 원숭이의 목테까지도 황금으로 만든다”고 <천애갈망자의 산책>에서 언급했다. 아랍의 사학자인 알 마크다시(946~1000년 추정)는 <창세와 역사서>에서 “신라인들은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도 황금 그릇에 먹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삼국사기>에도 흥미로운 기사가 담겨있는데, “신라 눌지마립간(417~458년)이 434년에 백제 비유왕(427~455년)에게 황금과 야광구슬을 예물로 보냈다”는 내용이다.
신라가 백제에 선물로 보냈을 만큼 황금이 흔했다는 의미다. 위의 기록이 당대 신라의 국제적 수식어가 ‘황금의 나라’였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출토된 유물을 보면 순금을 추구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기의 백제 유물은 거의 대부분이 순금이었던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순도냐 광택이냐

단순히 금의 함유량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분석이 눈길을 끈다. 광택을 내기 위해 은을 섞었다는 의견도 있다. 붉은 빛이 감도는 순금도 물론 아름답지만 약간의 은을 첨가하면 더욱 단단할 뿐만 아니라 광택의 반짝임도 더할 수 있다. 금은 기본적으로 부드러운 성질을 지니고 있어 쉽게 휘고 구부러지는 경우가 있다. 금은 합금은 이를 보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더 강하고 반짝이는 금관을 위해 순금을 고집하지 않고 은을 섞은 것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시기가 가장 빠른 교동 금관의 순도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처음에는 신라도 백제처럼 순금에 가까운 금관 제작을 추구하다가 금관의 강도를 유지하기 위해 은을 섞었으리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100 % 확언하지는 못한다. 신라의 금관은 은의 비율과 무관하게 굉장히 약했다. 관테도 두 개의 금 못으로만 고정한 탓에 조금만 움직여도 세움 장식이 꺾여 내려앉는다. 따라서 단순히 강도를 높이기 위해 은을 섞었다고는 볼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금 구하기가 어려워서?

영화 더문 포스터

다른 해석도 있다. 만약 금의 소비량이 급증하면서 구하기가 점차 어려워진 것이라면? 금관으로 예를 들어보자. 금관은 무게가 만만치 않다. 교동 50.4 g, 금령총 356.4 g, 금관총 692 g, 서봉총 803.3 g, 황남대총 북분 1,062 g, 천마총 1,262.6 g 정도에 달한다. 어디 그뿐인가. 이중 천마총에서는 금관(1,262.6 g·곡옥 포함) 외에도 금제관모(398 g), 금제관식(244.8 g), 금제관식(나비모양·138.6 g), 금 허리띠 1,382.3 g(곡옥 2개 포함) 등 합계 3,426.2 g의 금제 유물이 출토됐다. 곡옥을 뺀 황금의 추정 무게만 약 2,800 g(746돈 정도)이다.
갈수록 황금에 열광하게 되니 소비량이 급증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러나 금이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지겠는가. 시간이 지날수록 금을 구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때문에 점차 금관에 섞인 은의 비율이 늘어났을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왕비를 위한 한정판 명품 팔찌까지

그렇다면 백제에서는 금이 흔했을까.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무령왕 시절 백제는 중흥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한성 함락과 웅진 천도(475년) 이후 축소된 국력을 추스르고 ‘갱위강국(更爲强國·다시 강국이 됨)’을 선언한 무령왕이 아닌가. 그러니 생전에 당대 최고의 장인이 만든 명품으로 치장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령왕 부부의 서거 이후 생전 착장을 그대로 왕릉에 묻어주었고, 오늘날 발견된 것일 지도 모른다. 발굴된 유품에는 사용된 흔적이 남아있었다. 예컨대 무령왕의 귀고리 한 쌍 중 한쪽을 보면 끊어진 부위를 금실로 꿰맨 흔적이 있다. 생전 무령왕이 이 귀고리를 달고 다니다가 끊어지자 보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흔적은 이뿐만이 아니다. 왕비가 찼던 ‘용무늬 은팔찌’의 안쪽에 새겨진 명문을 보자. “다리가 경자년(520) 2월 대부인에게 230주이(主耳·단위)를 들여 만들었다(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삽主耳).”라고 적혀있다. 520년이면 왕비가 서거하기 6년 전이다. 백제의 장인이었을 ‘다리’가 왕비를 위해 제작한 팔찌에 남겨둔 자신의 서명이 아니었을까. 이 팔찌가 바로 세상 단 한 명을 위한 삼국시대 한정판 명품 팔찌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