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청동기시대판 0.3 ㎜ ‘나노’ 기술⋯

국보경의 비밀

때는 1960년대 어느 날, 장소는 충남 논산 훈련소였다. 참호를 파던 병사들이 수수께끼 같은 물체를 발견했다.
흙과 녹이 잔뜩 묻은 고색창연한 청동기 세트였다. 심상치 않았다.
동심원과 삼각형 문양이 잔뜩 새겨진 청동거울과 방울 8개 달린 팔주령(2점),
포탄 모양의 간두령(2점), X자가 교차된 조합식(1점) 및 아령 모양의 쌍두령(2점) 등 청동방울이었다.
모두 청동기부터 초기 철기시대까지 제정일치 지도자가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청동기였다.
군인들은 이 청동기 세트를 중간 상인에게 팔아넘겼다.
중간 상인은 이중 청동거울은 숭실대 박물관에 팔았다. 나머지 청동방울 일괄은 수집가 김모씨를 거쳐 호암(리움)미술관으로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청동기 세트는 막연하게 강원도 출토품으로 알려지게 됐다.
이후 두 청동기 세트는 차례로 국보가 됐다. 훗날 두 국보는 같은 곳에서 출토된 세트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집중력의 화신

이중 특히 주목받은 유물이 바로 청동거울이다. 이 청동거울은 그동안 ‘고리()가 많은() 가는 무늬(細文) 거울()’이라는 뜻에서 ‘다뉴세문경’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다뉴세문경’은 일본학자인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1890~1983)가 붙였으니 왜색풍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의 ‘국보’ 정식명칭은 ‘정교한 무늬의 거울이라 해서 ‘정문경(精文鏡)’이다. 그러나 앞으로는 더 쉬운 표현인 ‘고운무늬 거울’을 쓰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이 청동거울에는 더 영광스러운 닉네임이 있다. ‘국보경(국보거울)’이다. 국보 중 국보라는 뜻이다. 왜 그런 영예를 얻었을까. 이른바 ‘국보경’은 기원전 3~2세기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장인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거울의 지름은 212~218 ㎜, 잔존 무게는 1,590 g 정도이다. ‘국보경’에는 반복된 동심원과, 그 동심원 안에 새겨진 무늬 그리고 직선을 이리저리 규칙적으로 새긴 삼각문양 등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다. 셀 수 있는 선이 1만 3,000개가 넘는다. 선의 간격은 0.3~0.34 ㎜, 원의 간격은 0.33~0.55 ㎜에 불과하다. 가히 0.3 ㎜의 ‘청동기시대판 나노기술’이라 할 수도 있다. 현대기술로도 새기기 힘든 이 국보경을 제작한 2,300년 전의 장인은 ‘집중력과 인내의 화신’이었을 것이다.

‘황금비율’을 추구하다

그렇다면 이토록 정밀한 문양을 어떻게 새겼을까. 지금도 수수께끼다. 고심을 거듭하던 연구자 가운데는 학술대회장에 대나무자와 참빗살로 개조한 컴퍼스를 들고 나온 이도 있었다. 대나무자로는 직선, 격자문 등을 새겨보았다. 참빗살 21가닥의 끝을 얇게 깎은 다치구 컴퍼스로는 간격이 0.33~0.55 ㎜에 불과한 동심원을 그려보았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2300~2200년 전 기술자가 그런 식으로 선과 동심원을 그렸다 치자. 다시 근본적인 의문점이 생긴다. 0.3 ㎜의 극초정밀 청동거울을 어떻게 주조했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국보경을 두고 첨단과학으로도 풀 수 없는 불가사의라고 혀를 내둘렀던 이유였다. 2007~2008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의 분석결과 ‘국보경의 실체’에 한발 다가가는 성과를 얻어냈다. 즉 국보경이 구리 61.68 %, 주석 32.25 %, 납 5.46 %를 함유한 것으로 분석됐다. 구리와 주석 비율만 따지면 65.7대 34.3이었다. 이게 의미심장하다. 고대 청동기의 합금비율을 기록한 중국의 <주례> ‘고공기’에 기록된 ‘금유육제(金有六齊)’ 내용을 해석하면 ‘구리 67대 주석 33’을 ‘합금의 황금비’라 한다. 국보경을 고대 청동거울의 황금비(67 대 33)와 견주면 단 1% 정도의 오차가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국보경은 “2300~2200년 전 청동기 기술이 최고 정점에 달할 때 제작된 유일무이한 작품”이 된다.
왜 그런 평가를 내렸을까. 청동거울의 경우 주석의 함유량이 높아질수록 색깔이 적색에서 백색으로 변한다. 즉 주석의 함유량이 10~20 %는 담황색, 20~30 %는 회백색, 30~40 %는 은백색을 띠게 된다. 은백색을 띠면 당연히 거울의 빛 반사성능은 좋아진다. 그래서 <주례> ‘고공기’가 이상적인 청동합금 비율을 ‘주석 33 %’라 한 것이다. 그럼 다른 청동거울도 주석 함유량을 30 % 이상으로 높이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중국이나 국내의 다른 청동거울은 주석의 함유량이 현저하게 낮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주석 함유량이 높아지면 색깔은 은백색으로 변하지만 22 %가 넘어가면 치명적인 단점이 생긴다. 인장강도(잡아당기는 힘에 견디는 저항력)가 급격히 떨어진다. 그 경우 거울은 쉽게 깨질 수밖에 없다. 기원전 3~2세기 국보 141호 청동거울을 만든 장인은 쉽게 깨지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황금비율로 알려진 구리·주석 비율(67 대 33)에 맞추려고 분투했다. 0.3~0.55 ㎜ 간격으로 그은 1만 3,000여 개의 선과 동심원을 천신만고 끝에 다 그려놓고도 아차! 하는 순간에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국보경은 청동기 제작기술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최상의 황금비율로 제작했다. 그 덕분에 색상과 반사율 면에서 최상의 조건을 갖춘 극초정밀의 예술품로 탄생할 수 있었다.

국보경에 서려 있는 인간미

물론 그렇게 완벽하다는 국보경에도 몇 가지 흠결이 발견된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의 분석결과 국보경은 ‘주물사 주조법’으로 제작된 것으로 해석됐다. 주물사 주조법은 입자가 미세하고 점토분이 많은 모래를 굳혀 그 위에 문양을 새긴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제작하는 기법을 일컫는다. 그런데 분석결과 거푸집의 재료인 모래가 정문경의 거울면(경면)과 무늬면(뒷면)에 걸쳐 혼입된 사실이 확인됐다.

다른 결함도 보였다. 주물사에 쇳물을 부어 거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거푸집이 분리되어 다른 곳으로 박혀있었다. 또 주형의 모서리가 붕괴되어 원래의 모습이 사라졌고, 표면에 쥐꼬리 모양의 결함이 일어나기도 했다. 거푸집의 주물사에 수분이 너무 많았거나 점토분이 적어서 일어나는 흠결이다. 하지만 이런 흠결은 오히려 2300년 전보다 정밀한 청동거울을 제작하고자 했던 장인의 치열한 분투에 비하면 그저 구우일모(九牛一毛)라 할 수 있겠다.
정문경에는 또한 당대 청동기 장인의 손맛을 느낄 수 있는 문양이 보인다. 동심원의 한가운데를 장인의 손으로 그린 흔적이다. 생각해보면 다치구 컴퍼스로 그린다고 해도 한가운데 부분은 동심원으로 표시하기 어렵다. 게다가 한가운데엔 컴퍼스를 그릴 때 생기는 자국(원점)이 존재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자국을 주물사로 메우고 그 위에 화룡점정 하듯 마지막 동심원을 손으로 그려 넣었을 것이다. 극초정밀의 예술을 보여주면서도 일말의 인간미를 보여주는 장인의 센스가 아니겠는가.
또 이 국보경은 실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이 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끈을 매달아 사용한 마찰 흔적이 두 고리(紐)에서 확인됐다. 이는 한 사람이 정문경을 하나의 끈으로 두 개의 고리에 관통해서 매달아 사용했음을 암시해준다. 그랬으니 두 고리의 바깥쪽 윗부분에 끈이 마찰된 흔적이 보이는 것이다.

0.3 ㎜의 초정밀 예술

그렇다면 누가 이 청동거울을 달고(혹은 들고) 다녔을까. 지금까지 청동거울 자체도 태양을 상징하고, 거울 표면의 십자문과 ×자문, 동심원 등은 강렬한 햇빛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2300~2200년 전, 하늘과 인간, 땅의 소통을 독점하는 제정일치 시대의 지도자라면 어떨까. 은백색의 청동거울을 가슴팍에 달고 햇빛을 반사하면서, 양손에는 팔주령과 간두령, 쌍두령 같은 청동방울을 흔들며 하늘신·조상신과의 소통을 시도했을 것이다. 백성들은 강렬한 햇빛과 요동치는 방울 소리에 경외감을 느꼈을 것이고⋯.
1975년 당시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도쿄(東京)에서 열린 한일국교정상화 10주년 기념 특별전 제목을 ‘한국미술 5000년 전’이라 붙였다. 1973~75년 사이 암사동 선사유적지에서 기원전 3000년 전 유물인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됐기 때문이다. 토기를 3~7단으로 상·중·하로 화폭(토기표면)을 나눠 갖가지 무늬를 새긴 선사인들의 예술품이 아닌가.
결국 기원전 4500~3000년 사이에 유행한 빗살무늬토기의 제작기법이 기원전 300~200년에 되어 ‘청동기시대판 나노 기술’이라 할 수 있는 극초정밀 예술품(국보경)으로 정점을 찍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