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하늘의 변화를 읽는 것은 하늘과 백성을 연결하는 왕의 능력이었다.
즉 천문의 변화를 읽어 백성들이 농사를 제 때 지을 수 있도록 알려주는 게 군주의 몫이었다.
“고대 부여에서는 기상이변으로 농사를 망치면 군주를 죽이거나 쫓아냈다”는 기록이 있다.
하늘의 변화를 읽는 자가 바로 군주!
그럼 하늘의 변화를 어디서 관측하는가. 그곳이 바로 ‘별(星)을 바라보는(瞻) 구조물(臺)’인 첨성대이다. <삼국유사> ‘선덕여왕 지기삼사’조에서는 “선덕여왕 연간(632~647)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瞻星臺)를 축조했다”고 기록했다. 후대의 역사·지리서 역시 첨성대를 천문대로 설명했다.
“첨성대는 선덕여왕이 쌓았다. 돌을 쌓아 만들었는데 … 가운데를 통하게 하여 사람이 올라가게 되어 있다”(<세종실록> ‘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1476년(성종 7년) 편찬한 편년체 사서인 <삼국사절요>에서는 첨성대의 축조연대를 ‘647년(선덕여왕 16년) 1월’로 못 박았다. 조선 후기 이유원(1814~1888)이 엮은 <임하필기>는 더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선덕여왕 재위 때 첨성대를 만들었다. … 성덕왕(702~737) 때 누각(漏刻·물시계의 일종)을 만들었다”(‘문헌지장·관측기구’편)
‘첨성대=천문대’설은 1909년 일본의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가 재확인했다. 미국의 천문학자 윌 칼 루퍼스와 영국의 과학사가인 조지프 니덤도 첨성대를 천문대로 국제학계에 소개했다. 이후 ‘첨성대=천문대’설은 공리처럼 여겨졌다.
흔들린 ‘첨성대=천문대’설
그러나 1960년대부터 분위기가 달라진다. <삼국유사>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견해가 우후죽순으로 등장한다. 나름 근거가 있었다. 첨성대를 보면 오르기가 힘들고 꼭대기 공간이 너무 좁아서 천문을 관측하기에 불편하다. 1평도 안 되는 공간에서 무슨 천문관측이라는 것인가. 먼저 ‘규표설(圭表說·1859)’이 처음 나온다. ‘규표’는 지상에 수직으로 세운 천문관측용 막대를 뜻한다. 첨성대가 4계절과 24절기를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 세운 규표라는 것이다.
1970년대엔 ‘주비산경설’이 제기된다. 첨성대에는 1대 3의 원주율과 3:4:5의 구고법(句股法·피타고라스 정리)이 상징적으로 숨어있다는 것이다. 즉 첨성대 몸통의 윗지름이 문(창구) 한 변 길이의 약 3배(원주율 3.14와 비슷)에 해당된다. 또 몸통 밑지름과 정자석 한 변의 길이는 약 5대 3이고, 몸통부의 높이와 기단석의 대각선 길이는 약 5대 4이다. 이는 고대 천문수학서인 <주비산경>에 나오는 직각삼각형의 원리(32+42=52)를 상징한다.
‘수미산설’도 등장했다. 수미산은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이다. ‘병’ 모양인 첨성대가 수미산 모양을 본떠 만든 제단이라는 설이다. 근래 들어 ‘우물설’도 제기됐다. 원통형 몸체에 우물 정(井)자 모양의 돌을 올린 모양이 우물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우물은 신라의 개국신화와 연관성이 있다. 시조 박혁거세(기원전 57년~기원전 4년)가 ‘나정(蘿井)’에서 탄생했다는 신화가 있는데 요즘 ‘첨성대=우물’설과 관련해서 더 흥미로운 견해가 등장했다. 첨성대가 선덕여왕과 석가모니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즉 선덕여왕은 ‘성스러운 조상을 둔 여황제’라는 뜻에서 ‘성조황고(聖祖皇姑)’의 존호를 받았다고 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선덕여왕’ 그 선덕여왕의 ‘성스러운 조상(성조·聖祖)’이 바로 ‘박혁거세와 석가모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여성의 산도(産道)를 닮은 ‘우물’은 박혁거세의 탄생을 상징한다. 또한 첨성대는 석가모니의 탄생을 뜻하기도 한다. 즉 첨성대의 가운데 문(창구)이 석가모니가 태어난 마야부인(석가모니의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라는 것이다. 첨성대를 둘러싼 갖가지 설을 음미해보면 어떤가. 더러는 일리 있고, 더러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설들이 백가쟁명처럼 터져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물 안에서 대낮 우주를 관찰했다?
그러나 어떤 견해도 <삼국유사>와 <세종실록>, <삼국사절요> 등이 소개한 ‘첨성대=천문대’설을 뒤집을만한 결정적인 반증은 없다. 그런 가운데 최근 해외 사례까지 검토해 새롭게 제기한 주장에 눈길이 간다.
그 역시 ‘우물설’의 확장 개념이다. 즉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인 클레오메데스는 “우물 바닥에서 태양을 보면 평소보다 크게 보인다”고 했으며, 또 고대 로마의 자연과학자 플리니는 “대낮에도 우물에 반사된 별빛을 관측할 수 있다”고 했다. 신기한 일이다. 유명한 속담 가운데 ‘우물 안 개구리’가 있지 않은가. 드넓은 세상을 우물만큼의 넓이와 깊이로만 파악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속담이다. 그런데 그런 우물 속에 있어야 대낮에는 볼 수 없는 별을 관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낮에 별을 볼 수 없는 이유가 뭘까. 수증기를 비롯한 대기 중의 많은 미세입자들이 햇빛에 난반사되어 별에서 지구로 오는 빛을 가려버리기 때문이다. 낮에 별을 보려면 난반사를 최대한 억제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오늘날 대낮의 별 관측은 암상자(Camera Obscura)를 이용한다.
그런데 고대사회에서는 바로 깊은 우물이 암상자의 대체물로 주간 별 관측에 이용됐다. 이런 전통이 후대 이슬람권에 이어져서 우물이 천문관측에도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1428년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 건립된 울루그 베그 천문대가 그런 형태이다. 1579년에 그려진 이스탄불 천문대의 부속건물인 주간 천체관측용 우물 탑 그림도 남아 있다. 이들은 모두 대낮에 별자리를 관측하는 용도로 사용된 천문대들이다.
그렇다면 첨성대 또한 주간에 별을 관측하기 위한 우물일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보면 그동안 제기되었던 갖가지 의문점이 어느 정도 해소된다. 즉 첨성대 내부에서 꼭대기로 올라가라는 것이 아닌, 그 안에서 천정을 지나는 대낮의 별자리를 관측하라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견해도 역시 맞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상상력의 폭을 넓힐 수 있는 흥미로운 주장임은 분명하다.
첨성대는 피사의 사탑?
어떻든 그렇게 1300년 가까운 성상을 쌓은 첨성대가 기울고 있다는 계측 결과가 세인의 우려를 사고 있다. 2009년 국립문화재연구원의 최초 관측 때 북쪽으로 200 mm 정도 기울어져 있다(기울기 1.19도)는 결과가 나왔다. 그것도 불안했는데 2016년 9월 12일 더욱 큰 일이 벌어진다. 경주를 중심으로 관측 사상 가장 규모가 큰 진도 5.8의 강진이 발생한 것이다. 이후 8일 간 모두 600회가 넘는 여진이 이어졌다.
지진의 영향으로 첨성대는 북쪽으로 21.3 mm, 동쪽으로 10 mm 정도 일시에 확 기운 것으로 측정됐다. 4 mm가량의 배부름 현상도 포착됐다. 이후 4차례 측정한 결과 4.5 mm가 추가로 기울어졌다는게 확인됐다.
첨성대는 북쪽 면을 기준으로 총 ‘22.58 cm’ 기울었다. 첫 조성 때 첨성대를 똑바로 세웠다고 가정하면 1400년 동안 22.58 cm 북쪽으로 기울었다(1.47도 기울기)는 얘기가 된다. 아닌 게 아니라 첨성대의 사진을 가만히 보면 평형 상태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
곧 무너질 정도는 아니라지만 늘 예의주시해야 한다. 활성단층이 존재하는 경주 주변에서 2016년과 같은 큰 지진이 다시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의 일말의 불안감이 앞으로도 영영 ‘기우(杞憂)’로 판명되기를 바란다. 이 순간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1400년 전 신라인들이 이 첨성대에서 관측한 별은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