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

나와 철도의 인연

 
철도에 대한 나의 첫 추억은 어머니 손을 잡고 영등포역에서 기차를 탔던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이니 1960년대 말일 것이다. 넓은 광장을 지나 길쭉하게 생긴 영등포역에 들어서니 철창을 연상시키는 높은 개표구가 보이고, 무섭게 생긴 철도원 아저씨가 지키고 서있어서 겁이 덜컥 났다. 검정색 제복에 경찰처럼 모자도 쓰고 있었는데, 그 앞을 지날 때 어머니 손을 놓칠세라 더욱 힘을 주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그 때 기관차는 디젤이 아닌 증기기관차였다.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1967년 8월 31일 서울역에서 이미 증기기관차 종운식을 했다지만, 나의 첫 기차여행은 증기기관차가 맡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시커먼 증기기관차는 바퀴 쪽으로 하얀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객차가 좀 특이했다. 바닥은 시멘트로 되어 있고, 푹신한 시트가 아니라 나무로 만든 장의자가 놓여 있었던 것 같다. 전쟁 이후 객차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절 화차를 개량하여 대용객차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러면 내가 처음 탄 기차가 바로 대용객차로 편성된 완행열차였을까?
부모님은 5남매를 낳아 기르셨다. 1960년대 후반부터 양계업을 하셨는데, 농장일은 아버지가 맡고 어머니는 시장에서 계란가게를 하셨다. 1960년을 시작으로 1966년까지 7년 사이에 태어난 다섯 남매가 하나둘 학교에 들어가면서 제법 농장 일을 도울 수 있게 되었지만 집안형편은 무척 어려웠다. 아버지는 석유파동에 이어 대홍수까지 겹쳐 양계에서 손을 뗀 이후에는 사료 대리점도 하고, 이삿짐센터에서 운전도 하셨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철도고등학교 재학시절

철도고등학교 본관(1983)

1979년 가을, 나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진로를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 그땐 5남매 중 넷이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녔으니 아버지 혼자 벌어 학교 등록금을 감당하기도 버거운 시기였다. 어느 날 귀가한 아버지 손에 철도고등학교 입학원서가 쥐어져 있었다. 3년 내내 국가장학금이 지급되고, 졸업과 동시에 철도공무원 채용이 보장되는 학교, 전국에서 수재가 모여든다는 특수목적 고등학교였다. 아무리 서울에 있는 국립학교라고 해도 당시 친구나 선생님들은 모두 말리는 분위기였다. 무엇보다도 실업계 학교라 대학 진학이 쉽지 않을 거라는 염려가 컸다. 그런 분위기에서 연합고사를 치렀다. 1차 선발이라 합격하면 다행이고, 떨어지면 그 성적으로 인천지역 인문계열 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1차 합격자 발표 후 2차는 신체검사였다. 철도와의 만남은 운명이었는지 2차까지 무사히 통과하여 3년간의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다. 버스를 타고 개봉역까지 가서 전철로 갈아타고 용산역에 내려 조금만 걸어가면 유서 깊은 철도학교가 있었다. 나는 업무과였기 때문에 여객규정ㆍ화물규정ㆍ운전규정 등을 기본으로 배웠고, 주산ㆍ부기ㆍ기업회계ㆍ법학개론 등도 배웠다. 물론 일반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국영수와 물리ㆍ화학도 배웠지만 아무래도 비중이 적었다. 입학하자마자 들은 것 중에서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철도개론> 시간에 들은 것은 “철도는 사양 산업이다.”라는 말과 “한강철교 길이는 1,112m 80cm”라는 것이다. 이제 막 철도인의 길로 접어들려고 하는 어린 우리들에게 “너희들의 앞길은 깜깜하다.”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던 선생님의 마음은 어땠을까?
졸업 후 첫 발령지는 산 높고 물 맑은 강원도 영월의 연하역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대부분의 친구들은 이미 3년 동안의 학창생활을 통해 자취가 몸에 배어 있었으나 집에서 통학했던 내게 자취는 첫 경험이었다. 쉬는 날에는 읍내에 가서 시장도 봐오고 오골계도 기르면서 그렇게 철도원 생활을 시작했다.
1989년 겨울, 제천조차장역에 근무하던 시절 결혼을 했다. 아내는 남들이 영어단어와 싸우며 대학입시를 준비할 때,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펼쳐지던 지식과 교양의 향연 ‘금요개척자’ 강좌를 3년 동안 함께 들은 흥사단 아카데미 동기였다. 동요 속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처럼, 우리 아이들 셋 중 둘은 그렇게 철길 근처에서 나고 자랐다. 부역장 생활을 거쳐 초임역장은 2002년 팔당역에서 지냈다. 아담한 역사가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중앙선의 오래된 역인데, 그래도 일은 많았다. 시멘트 사일로가 있어 화물열차 출입이 끊이지 않았고, 구내에 대형 축대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철도박물관 본관(2022)

철도의 역사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홍보업무가 계기였다. 2003년 가을부터 본청의 고속철도 개통홍보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학교에서의 배움과 다양한 경력 덕분에 철도 현장에 관한 설명이나 자료 작성이 내 차지가 되었다. 2005년 철도청이 공기업으로 전환된 이후엔 철도역사 편찬이나 박물관 위탁운영 관리업무 등도 맡게 되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일본학과를 늦깎이로 졸업한 것은 이른바 간판이 필요해서가 아니었다. 순전히 개인적인 관심과 필요 때문이었는데, 이것이 대학원 과정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대전 본사 근무시절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마쳤고, 논문도 통과되어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주제는 일제강점기 철도경영과 관련돼 있어서 사실 경영학보다 역사학에 가깝다. 대학원 과정은 내게 공부하는 방법을 가르쳐줬고, 철도사에 대한 관심을 좀 더 구체화시켜 철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지금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철도에서의 마지막 보직이라고 생각했던 오류동역장 생활을 접고 철도박물관을 선택했던 것은 순전히 부채의식 때문이었다. 통근거리나 근무형태, 하다못해 보수 면에서도 온통 마이너스였지만 박물관으로부터의 SOS를 못 들은 척할 수 없었다. 어린 나를 이끌어 물질적·정신적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고, 가정을 이루어 아이들을 다 키울 수 있게 해주었고, 지금의 내가 있도록 해준 존재가 바로 철도가 아니던가? 사람은 죽을 때까지 어머니의 품을 잊지 못하듯 나는 아마도 철도의 은혜를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