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세계 최초의 시한폭탄 개발자,

이장손을 아십니까

<선조수정실록> 1592년 9월 1일자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려 있다. “경상좌병사 박진(?~1597)이 비격진천뢰를 성 안으로 발사했다. 왜적은 떨어진 비격진천뢰를 앞 다퉈 구경하다가 포탄이 터졌다. 소리가 진동했고, 별처럼 퍼진 쇳조각에 맞은 20여 명이 즉사했다. 놀란 왜군이 이튿날 경주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서애집>에는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있다. “비격진천뢰가 경주성 객사의 마당 한가운데 떨어졌다. 왜적들은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몰라 다투어 몰려들어 구경하고 서로 밀며 굴려보고 살펴보았다. 갑자기 포가 폭발하자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쇳조각이 별처럼 부서져 흩어지니 이를 맞고 즉사한 자가 30여 명 되었다. 이튿날 아침 적병이 성을 비운 채 도주했고, 경주가 드디어 수복됐다” 그러면서 류성룡은 “비격진천뢰포 하나의 위력이 수천 명 군사보다 낫다”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사실 경주성은 임진왜란 발발 직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1562~1611)가 이끄는 왜병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그 해(1592년) 8월 경상 좌병사 박진과 영천 전투에서 승리한 의병장 권응수와 정세아 등이 합세해서 경주성 탈환작전을 펼쳤지만 실패했다. 이에 박진은 결사대 1,000명을 모아 전열을 정비한 뒤 신무기인 비격진천뢰를 사용해 경주성 탈환에 성공한 것이다.

비격진천뢰란?

비격진천뢰는 화포에 장전해 심지에 불을 붙여 발사하면 목표물까지 날아간 뒤 폭발했다.

대체 비격진천뢰가 어떤 무기이기에 왜군들이 혼비백산 했을까. 비격진천뢰는 1591년 화포장인 이장손이 발명한 조선의 독창적인 최첨단 무기다. 신관(발화) 장치가 있어서 목표물까지 날아가 폭발하면서 천둥 번개와 같은 굉음과 섬광, 그리고 수많은 파편을 쏟아내는 작렬탄이었다. 시간을 조절해서 폭발한다는 면에서 일종의 시한폭탄이라 할 수 있다.
그 원리는 간단하다. 둥그런 무쇠 속에 대나무 통을 꽂고 대나무 통 안에 나선형의 홈을 파놓은 나무에 도화선을 칭칭 감는다. 빨리 폭발시키려면 도화선을 10번 감고, 더디게 폭발시키려면 15번 감도록 나선을 만든다. 이어 별도로 뚫린 구멍 속으로 무쇠 안에 화약과 마름쇠(삼각형 쇠), 흙을 잔뜩 넣고 화포에 장착한다. 그런 다음 비격진천뢰의 도화선과 화포의 도화선에 차례로 불을 붙인 다음 발사한다. 대나무 통과 그 안에 설치된 나선형 나무에 감은 도화선이 바로 발화장치가 되어 폭발시간을 조절하는 것이다.
물론 중국에도 12세기 금나라 때부터 ‘진천뢰’라는 비슷한 무기가 존재했다. 그러나 중국의 진천뢰는 철로 만들어진 용기 안에 폭발성이 강한 화약을 채워 넣은 것이다. 도화선을 사용해서 점화하여 손으로 던지는 휴대용 폭탄이었다. 일종의 수류탄인 셈이다. 하지만 조선의 비격진천뢰는 무쇠 내부에 설치된 발화 장치(죽통과 나선형 나무에 감은 심지)가 발화 역할을 한다. 이 발화장치가 폭발시간을 지연시킴으로써 화포발사가 가능했다. 단순 폭발이 아니라 날아가 폭발하는 작렬포였다. 그래서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해서 붙은 이름(진천뢰·震天雷) 위에 ‘포탄이 날아간다’는 의미에서 ‘비격(飛擊)’ 자가 붙었다.

비격진천뢰의 차이점

그렇다면 서양에서는 어땠을까. 서양에서도 대포로 발사하는 포탄은 있었다. 그러나 비격진천뢰와 같은 폭발탄이 아니었다. 대포에서 발사하는 포탄은 폭발하지 않는 단순한 고체덩어리였다. 그러니 그저 성벽을 부수거나 함선을 격파하는데 사용될 뿐이었다. 포탄이 적에게 도달할 때까지 폭발을 지연시키는 시한폭탄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1805년 나폴레옹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사용한 함포 발사물도 터지지 않는 포탄이었다.
비격진천뢰는 달랐다. 내부에 화약을 충전하고 발화장치를 갖추고 있어 적의 위치에 도달할 때 쯤 자체폭발을 일으켰다. 따라서 비격진천뢰는 성이나 함선격파용이 아니라 인마살상용이었다. 비격진천뢰는 폭발 때 발생하는 천둥번개와 같은 폭풍과 화염으로 적을 살상하는 효과를 낸다. 폭발음이 주는 공포감도 중요한 효과였다. 또한 파편인 마름쇠가 흩어져 터지니 그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전북 고창 무장현 관아의 무기고에서 11발의 비격진천뢰가 발굴됐다. (제공: 호남문화재연구원)

무장현 비격진천뢰 발굴 현장

비격진천뢰에 대한 기록

비격진천뢰 덕분에 경주성을 수복했다는 <조선수정실록>(위)과 류성룡의 <서애집>(아래).

비격진천뢰는 경주성 외에도 많은 전투에서 그 진가가 발휘된다. 1592년 10월의 진주대첩 때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성일의 <학봉집>에는 “목사 김시민은… 적이 몰려오자 비격진천뢰나 질려포를 터뜨리고, 큰 돌멩이와 불에 달군 쇠붙이를 던지기도 하고, 끓는 물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왜적들은 계속 죽어나갔는데, 비격진천뢰에 맞아 넘어져 죽은 시체가 수도 없이 쌓였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또 1593년 2월, 행주산성 전투에서도 “우리 군사들이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크고 작은 승자총통(휴대용 개인화기) 및 비격진천뢰와 지신포(신호용 탄) 등의 화기를 쏘았다”는 기록이 있다. 1597년 8월 13일, 남원성 전투에서도 “성 중에서 잇달아 진천뢰를 발사하여 적병의 사상자가 매우 많이 발생하자 적은 도로 물러갔다”고 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도 사용한 예가 나온다. 의병장 김해(1555~1593)의 <향병일기>는 “왜적을 토벌하는 방책으로 비격진천뢰를 능가하는 것은 없다”고 기록했다. 적군인 일본군은 어땠을까. 조선의 비밀병기를 ‘충격과 공포’로 받아들였다. 일본 측 기록인 <정한위략>은 “적진에서 괴물체가 날아와 땅에 떨어져 우리 군사들이 빙 둘러 서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발해서 소리가 천지를 흔들고 철편이 별가루처럼 흩어져 맞은 자는 즉사하고 맞지 않은 자는 넘어졌다”고 했다. 일본의 병기전문가인 아리마 세이호는 <조선역 수군사>에서 “비격진천뢰의 발화장치는 매우 교묘한 것으로 화공술의 획기적인 일대 진보라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비격진천뢰 제작에 대한 연구

지난 2018년 전북 무장현 관아터를 발굴하던 중에 비격진천뢰 11발이 무더기로 출토됐다. 이전까지는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등 5점 정도만 남아있었는데, 한 곳에서만 11점이 쏟아져 단박에 16점으로 늘었다. 비격진천뢰가 대거 출토되면서 심도 있는 연구 또한 이어지고 있다. 컴퓨터 단층촬영(CT)과 감마선 투과 촬영 결과 비격진천뢰의 벽 두께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었다. 즉 크기가 다른 형틀받침쇠 3개를 사용해 본체 내부에 조성된 공간의 두께를 조절한 것이다.
비격진천뢰가 대거 출토되면서 심도있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비격진천뢰를 제작할 때의 쇳물 주입구와 살상용 쇳조각 및 심지를 꽂아 넣는 뚜껑 부분은 두껍게 한 반면, 측면은 상대적으로 얇게 설계했다. 쇳물을 붓는 주입구와 쇳조각을 넣고 완전 밀폐시켜야 할 뚜껑 부분을 두껍게 처리해야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폭발해버리는 치명적인 오류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측면을 얇게 제작하면 목표물에 떨어진 비격진천뢰가 그 얇은 부분으로 일시에 터질 수 있게 되어 살상력을 배가시킨다.
또 비격진천뢰의 성분조직을 분석해본 결과 본체는 주조 방식으로, 뚜껑은 단조 방식으로 다르게 제작한 이유도 다르지 않다. 본체는 잘 깨지는 주조기법으로, 뚜껑부분은 질기고 강한 단조기법으로 만든 이유는 바로 폭발 때 뚜껑이 먼저 부서지는 것을 방지하고 본체가 쪼개지면서 쇠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기록되지 않은 이장손

그러나 역사 기록을 읽으면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에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당대 최첨단 무기를 개발해서 임진왜란 때 간과할 수 없는 전과를 세우는데 공을 세운 이가 누구인가. 바로 화포장 이장손이다. 그러나 비격진천뢰 개발자인 이장손 관련 사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장손의 존재는 <선조수정실록> 중 1592년 9월 1일에 경주성 전투를 설명하는 말미에, 그것도 실록을 쓴 사관의 부연설명에 겨우 등장한다. “비격진천뢰는 옛날에는 없었는데, 화포장 이장손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진천뢰를 대완포구로 발사하면 500~600보 날아가 떨어진다. 얼마 있다가 화약이 안에서 폭발하므로 진을 함락시키는 데는 가장 좋은 무기였다”그러나 그뿐이다. 당대 전 세계의 그 어느 포탄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자기술로 만든 최첨단 무기를 개발한 이장손의 생몰연도도, 가문도, 이력도 그저 물음표로 남았을 뿐이다.
실록은 ‘사관의 논평’만으로 처리했으며, 사대부의 문집이 언급해주지 않는 한 기록이 남아있을 리 없다. 비격진천뢰를 개발한 희대의 과학자가 받아야 할 대우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이런 과학자들을 제대로 대접해주고 그 기술을 장려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돌이켜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비격진천뢰 현장 발굴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