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발견

한국계 수학자의

첫 필즈상 수상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필즈상을 수상한 뒤 메달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제공 : 연합뉴스)

지난 7월 5일은 한국 기초과학사()에서 새로운 장을 연 날로 기록될 것이다. 이날 핀란드 헬싱키 알토대에서 열린 국제수학자대회(ICM) 개막식에서 한국계 수학자 허준이(39·June Huh) 프린스턴대 교수이자 한국 고등과학원 수학부 석학교수가 2022년 필즈상 수상자 4명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수상자 4명 중 2번째로 호명된 허 교수에 대해 국제수학연맹(IMU)의 필즈상 수상선정위원회는 “허 교수는 리드 추측을 비롯해 오랜 동안 난제로 남아있던 문제들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풀어냄으로써 앞으로 수학이 나갈 방향을 제시해 수학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번 필즈상은 한국인과 한국계를 포함해 첫 수상자를 배출했다는 것 이외에도 눈에 띄는 수상자가 있었다. 고차원에서 케플러 추측이라는 난제를 해결한 우크라이나 출신 마리나 비아조우스카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 교수이다. 현재 러시아 침공을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 출신이라는 점도 있지만, 노벨 물리학상 만큼이나 여성을 수상자로 선정하는데 인색한 필즈상의 역대 두 번째 여성 수상자라는 점이다.
여성 수학자 중 첫 번째 필즈상 수상자는 2014년 한국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서울 세계수학자대회’에서 나왔다. 기하학과 동력학계 분야 연구로 수상한 이란계 수학자 마리암 미르자카니(당시 37세) 미국 스탠포드대 교수가 주인공이다. 미르자카니 교수는 아쉽게도 필즈상을 수상한지 3년 뒤인 2017년 7월에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다시 허준이 교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필즈상은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ICM 개막식에서 40세 이하 수학자에게 시상한다. 다음 ICM은 2026년에 열리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정해진 필즈상의 나이 제한 때문에 허 교수에게는 올해가 마지막 수상 기회였다. 이번 필즈상 수상으로 명실공히 세계적인 수학자 반열에 오른 허 교수가 처음부터 수학을 잘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언론에서 보도됐던 것처럼 ‘수포자’(수학포기자의 줄임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수학에 엄청난 흥미를 갖고 잘 했던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도 구구단 외우기를 힘들어 했고, 아버지인 허명회 고려대 통계학과 명예교수가 수학 문제집을 풀라는 숙제를 냈는데 답안지를 보고 베끼다 혼나기도 했다. 어머니인 이인영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명예교수가 알파벳을 가르치다가 포기하기도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고등과학원 수학부 석학교수이기도 한 허 교수는 매년 여름 한국을 찾아 고등과학원에서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다. (제공: 고등과학원)

허 교수는 중학교 때 과학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싶었지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너무 늦었다’는 말을 듣고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시인 기형도를 좋아해 시인을 꿈꿨고, 고등학교 중퇴 후 검정고시로 서울대에 입학했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에 입학한 그는 세계적인 과학자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장래 희망을 시인에서 과학기자로 바꾸기까지 했다. 하지만 허 교수는 전공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공부를 하지 않다보니 F학점이 너무 많아 6년 만에 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던 중 1990년대 국내에서 출간돼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던 필즈상 수상자 히로나카 헤이스케 교수의 자서전 「학문의 즐거움」을 읽고 감동을 받았던 허 교수는 학부 4학년 때 서울대 초빙 석좌교수로 온 히로나카 교수의 강의를 듣고 전공을 수학으로 바꾼 ‘늦깎이 수학자’이다. 허 교수는 서울대 수학과 석사과정을 마치고 지도교수인 히로나카의 조언으로 박사과정 유학을 위해 미국의 대학 12곳에 지원했지만 11곳에서 떨어지고 히로나카 교수 추천서 덕분에 일리노이대에 겨우 합격했다.
허 교수가 박사 1년차일 때 풀었다고 하는 추측은 ‘리드 추측’, ‘로타 추측’, ‘웰시 추측’이다. 재미있는 것은 허 교수는 자신이 푼 문제가 유명한 수학 난제였다는 것도 몰랐다는 점이다. 이후 허 교수는 ‘다울링-윌슨 추측’을 비롯해 다양한 수학 난제들을 차례로 풀어 내 ‘난제 컬렉터’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이다. 리드 추측은 1968년 영국 수학자 로날드 리드가 제시한 채색다항식 관련 조합론 문제이다. 어떤 그래프에서 이웃한 꼭짓점을 서로 다른 색으로 칠할 때 n개 이하의 색만 써서 칠하는 방법의 수를 나타낸 식을 ‘채색다항식’이라고 한다. 중고등학교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다리 7개를 반드시 한 번씩만 건너서 모두 지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같다. 허 교수는 조합론 문제를 1차, 2차, n차 다항식으로 표현되는 대수기하학으로 풀어낸 것이다. 엄상일 카이스트 수리과학과 교수(기초과학연구원 이산수학그룹 그룹장)는 허 교수의 업적에 대해 “두 분야 중간에서 양쪽 언어를 동시에 구사하면서 대수기하 분야 연구결과와 아이디어를 활용해 조합수학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라고 설명했다.
올해 필즈상은 우크라이나 출신 수학자 마리나 비아조우스카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 교수도 수상했다. 필즈상 역대 두 번째 여성 수상자이다. (제공: 스위스 로잔연방공과대)

또 많은 사람들이 허 교수의 업적이 실생활이나 산업분야에서 어떻게 응용되는지 궁금해 한다. 수상 후 기자간담회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나왔는데, 허 교수는 “순수수학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어떻게 응용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 본적이 없다”라고 답하기도 했다. 사실 수학자를 비롯해 물리학 분야에서도 순수 기초과학을 하는 이들은 자신의 연구가 어떻게 응용될 것이라고 연구하지도 않고, 응용된다고 하더라도 본인의 연구가 어떻게 적용됐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허 교수의 연구 결과는 수학자와 이론전산학자의 협업으로 효율적인 알고리즘을 고안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허 교수의 업적은 정보통신, 반도체 설계, 교통, 물류, 인공지능 기계학습, 통계물리 등 여러 응용 분야 발달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