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

어느 겨울밤의 다짐처럼

권수경 감독

눈이 부셨다. 아니 그것은 이제 곧 초등학교 졸업을 코앞에 둔 아이의 눈엔 충격이었고 전율이었고 공포였다. 사실 그때 내가 느꼈던 그 감정은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자유 여신상!’, ‘이곳이 지구라니…’ 그렇게 영화는 내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나를 집어삼켜 버렸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 오늘날 ‘반전 영화’의 대명사인 영화 <식스센스>를 능가하고도 남을 가공할 만한 충격과 공포로 몸서리치게 했던 그날의 겨울밤. 당시 극장이라는 문턱을 넘어본 적이 없었던 산골 소년을 매주 토요일 영화의 세계로 이끌었던 건 ‘주말의 명화’였다. 흑백 TV 화면 속의 영화 <혹성탈출>의 마지막 장면인 어느 해변 모래 속에 거의 파묻힌 채 횃불을 든 자유 여신상 앞에서 남자 주인공 ‘찰턴 헤스턴’의 절망스러운 눈빛에 난 생각했다. ‘그래, 나도 나중에 이런 멋진 영화를 만들며 살아야겠다. 이렇게 가슴 떨리는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라고. 창밖으로 함박눈이 소리도 없이 하얗게 쌓여가던 그 겨울밤, ‘할리우드 키드’로의 출발을 알렸던 겨울방학이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소백산맥 끄트머리 산자락에 있는 예천이라는 곳이다. 그렇게 작은 소도시인 예천 읍내에서도 10리는 더 산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작은 산골 마을이었다. 근처를 지나는 신작로(큰길)에서조차 잘 보이지 않던, 사방으로 울창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는 그런 동네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주 무대였던 ‘동막’과 아주 흡사한 곳이었다. 바로 그 동막골 같은 곳에서 난 태어났고, 산과 들에서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여름이면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겨울이면 산에 올라서 토끼몰이를 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런 내 유년의 기억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그 산골 마을은 그래서 모든 것이 늦었다. 울창한 나무들로 인해 해가 늦게 떴고, 그만큼 빨리 졌다.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기가 참으로 힘들었던 철의 장막(?) 속 같던 그 산골 마을에서, 처음 TV로 접한 ‘주말의 명화’ 속 영화는 나를 차츰차츰 ‘할리우드 키드’의 삶으로 이끌었다. 난 매주 토요일을 손꼽아 기다렸고, 토요일 밤은 내게 있어 새로운 세상과 조우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난 TV를 떠나 읍내에 하나 있던 유일한 극장의 스크린으로 영화의 둥지를 바꿨다. 극장 모서리에 거미줄을 타고 왕거미가 내려와도, 스피커가 망가져 잡음을 쏟아내도 그리고 등받이가 떨어져 나가 허리를 곧추 세우고 영화를 보는 불편함에도 난 마냥 좋았다. 그냥 영화를 보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이렇게 열악한 시설의 시골 극장의 어두컴컴한 어느 구석진 자리를 차지하고 어른들 몰래 숨어 들어가 봤던 <차타레 부인의 사랑>에 가슴이 뛰었고 <석양의 무법자>의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열광했다. 그곳에서 난 영화감독의 꿈을 먹고 자랐다.
영화감독의 꿈을 펼치고자 영화과에 진학하려는 꿈은 판검사 아들을 두고 싶었던 부모님, 특히 아버지의 꿈에 무참히 밟혔다. 흙만 파셨던 늙은 농부는 자신의 아들만은 펜대를 놀리는 직업을 갖기를 원했고 난 그 소망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난 선생님이 될 거라는 거짓말을 하고 국문과에 진학했다. 국문과를 선택한 이유는 글 쓰는 법, 특히 시나리오 쓰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니 선생님이 되겠다는 거짓말은 결국 지금 내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묘한 아이러니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과 출신이 아닌 내가 찾은 직장은 광고 제작사였다. 그렇게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나는 시간이 지나 CF 감독으로 유명한 TV 광고들을 여러 편 연출하며 돈도 꽤나 모았다. 그렇게 20대가 끝나고 30살이 되던 해, 난 잠시 잊고 살았던 내 꿈을 끄집어냈다. ‘그래, 내 꿈은 영화감독이 아니었던가?’ 그 길로 난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유학 길에 올랐다.
권수경 감독의 데뷔작 영화 ‘맨발의 기봉이’ 포스터(제공: 쇼박스)

영화연출 석사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까지 난 4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 4년의 시간은 끊임없이 내게 좌절과 포기의 악수를 청해왔지만 그 악수를 거부하며 버텨왔다. 반지하 월세방에서 노트북 하나 딸랑 들고 밤새 써 온 시나리오들이 숱하게 거절당하고 또 거절당했다. 27년 간 수감생활을 했던 남아프리카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말했다.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절대 넘어지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데 있다”라고. 넬슨 만델라의 명언처럼 넘어질 때마다 일어섰던 나는 드디어 2006년, 영화 <맨발의 기봉이>로 감독 데뷔를 하게 되었고, 다음으로 <형> 그리고 올해 개봉한 <스텔라>의 연출을 하며 지금도 영화감독으로 살고 있다. 네 번째 작품을 준비하며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지난날의 기억들이 프리즘을 통과한 빛처럼 머릿속을 스쳐간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은 “영화감독을 한다는 것은 마치 놀이동산의 범퍼카에다 톨스토이의 고전 <전쟁과 평화>를 새겨 넣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나는 여전히 고통을 감내하며 영화감독으로 살고 있다. 물론 앞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을 하는 영화감독으로 살 것이며, 어린 시절 창밖으로 함박눈이 하얗게 쌓여가던 그 겨울밤의 다짐처럼, 그렇게 가슴 떨리는 일을 하는 영화감독으로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