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끝없는 우주에 대한 관심

홍대용에서 최한기까지

홍대용, 과학에 눈뜨다

홍대용의 의산문답

한때 김석문에 앞선 지전설의 창시자로 일컬어지기도 했던 담헌 홍대용은 조선 후기 실학자이며 과학사상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홍대용의 과학사상은 그의 문집인 『담헌서』에서 전해지는 〈의산문답〉이라는 글에 모두 드러나 있다. 여기서 그는 지전설과 무한우주론을 주장했으며 이러한 자연관을 근거로 중국과 오랑캐, 즉 화이의 구분을 부정하는 한편,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도 대자연의 일부로서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라는 실로 대범한 주장을 펼쳤다.
그가 과학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766년 북경을 방문하여 서양과학을 접하면서부터였다. 연행사의 서장관으로 임명된 작은아버지 홍억의 수행 군관이라는 명목으로 중국을 따라가게 됐는데 60여 일간 북경에 머물면서 서양 선교사들을 찾아가 서양문물을 구경하고 필담을 나눈 것은 이후 자신의 사상을 살찌우는 계기가 되었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인 김원행의 제자이기도 한 홍대용은 북학파의 실학자로 유명한 박지원과도 깊은 친분이 있었는데, 박지원의 『열하일기』도 홍대용의 북경 방문기에서 영향을 받아 지어진 작품이라 알려져 있다. 아무튼 그의 북경 방문은 박지원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가져다준 경험이었다.
특히 홍대용의 과학사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의산문답〉은 실제 북경 여행을 배경으로 쓰인 것이기도 하다. 의무려산(醫巫麗山)에 숨어사는 실옹과 조선의 학자 허자 사이의 대화 형식으로 쓰인 이 글은 그가 실제로 북경 방문길에 들른 의무려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서양과학에 눈을 뜬 홍대용은 이후 기존의 천체관에 회의를 품으며, 그를 유명하게 만든 중요한 이론인 지전설과 무한우주론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홍대용의 우주관

홍대용을 유명해지게 한 지전설은 〈의산문답〉에 실려 전해지는데 그는 여기서 “지구는 회전하면서 하루에 일주한다. 땅 둘레는 9만 리이고 하루는 12시이다. 이 9만 리의 거리를 12시간 만에 달리기 때문에 그 움직임은 벼락보다 빠르고 포환보다 신속하다”라고 하여 김석문의 것과 유사한 내용의 지전설을 주장했다.
홍대용의 이론은 금성, 수성, 화성, 목성, 토성 등의 행성은 태양 둘레를 돌고 태양과 달은 지구의 둘레를 돈다는 티코 브라헤의 체계를 바탕으로 한 우주관에 지전설만을 덧붙인 것이었다. 따라서 홍대용의 지전설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그는 “지전설은 송나라 장횡거가 그 원리를 조금 밝혀냈으며, 서양 사람도 배에 타고 있으면 배가 나아가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주행안행설로서 추설해냈다”고 하여 지전설을 서양천문학을 통해서 알게 되었음을 밝혔고, 아울러 이 설이 이미 송나라 시대에 제기되었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사실 홍대용의 우주관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우주론’이다. “우주의 뭇 별들은 각각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끝없는 세계가 공계에 흩어져 있는데 오직 지구만이 중심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게 그의 무한우주론이다. 이 이론은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실로 대담하고도 독창적인 것이었다. 물론 고대 선야설이 무한의 공간을 상정하기도 하고 장횡거의 우주관도 이와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었지만, 홍대용처럼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따라서 “지구가 칠정의 중심이라 한다면 옳은 말이지만, 이것이 바로 여러 성계의 중심이라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물에 앉아 하늘 보는 소견이다”라는 인식론적 대전환을 제기했다는 측면이 과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홍대용 우주관에 대한 역사적 견해

충청남도 천안시에 위치한 홍대용 묘소

그러나 나는 홍대용의 우주관을 과학사적 입장에서보다는 역사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그의 우주관을 두고 그 이전에 비해 얼마나 과학적으로 진보했고 독창적이었나를 따지는 것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다소 무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그가 무한우주론을 주창하게 된 배경이 아닐까 싶다. 즉 무한우주론을 바탕으로 홍대용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우주론 자체가 아니라 “지구를 하늘에 비교한다면 미세한 티끌만큼도 안 되며, 중국을 지구와 비교한다면 십수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탈중화적 세계관이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헤아릴 수 없는 별의 세계가 우주에 산재하고 있다는 홍대용의 우주관은 세계 중심이 중국이라는 전통적인 중화사상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그의 우주관이 순수한 과학정신의 발로였다는 입장에서 무조건 추앙할 것도 아니며, 순전히 사변적인 추리의 결과일 뿐이고 기존의 권위적인 우주관과 충돌하는 것에 무심한 동양 천문학의 분위기 탓에 빚어진 결과라고 평가절하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어떤 사회가 새로운 과학사상을 수혈 받았을 때, 그것이 얼마나 과학적이었는가를 따지는 것이 역사의 본령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에서는 그것이 그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어떤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최한기의 우주관

한편 19세기에 들어와 최한기(崔漢綺, 1803~1877)의 우주관은 초기에 지구구형설 및 지구자전설을 내용으로 한 지구중심설에서 후기의 태양중심설로 진화해 나갔다. 이는 서양의 우주관을 수용한 결과다. 그는 태양중심설과 만유인력의 개념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도입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모든 존재와 현상을 기()로 설명하는 기학적 세계관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다. 천체의 운행이나 조석의 원인뿐만 아니라 만유인력이나 섭동의 현상에 대해서도 그 원인을 기의 운화(運化)에 두었다. 최한기는 자신의 세계관을 통해 서학을 수용했지, 서양과학에 대한 맹신에 기반을 둔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그 또한 홍대용과 같이 우주에 대해 유난히 관심이 많은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