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

음악을

더 흥미롭게
말할 수 있다면

요즘 나는 어딜 가나 ‘BTS 전문가’라고 불린다. 미국에서 오래 유학을 하기도 했고 미국 언론에도 종종 케이팝 평론을 기고해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심지어 최근에는 외국에서도 나를 BTS 혹은 케이팝 전문가로 찾아주고는 한다. BTS라는 세계적인 그룹이 만들고 있는 그 역사적인 행보에 내가 전문가로서 한마디 보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게다가 어떤 한 분야의 전문가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에 더욱 영광스러운 마음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런 전문가 대우가 내게 큰 부담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적지 않다. ‘BTS 전문가가 다른 음악을 뭘 잘 알겠어?’라며 음악평론가로서 나의 경력과 전문성을 의심하는 시선에서부터 ‘음악평론가가 무슨 아이돌 이야기를 해?’라는 아이돌 음악에 대한 케케묵은 편견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 BTS에 대해 좋게 이야기해주니 하이브 주식 좀 갖고 있겠군?’과 같이 직업인으로서 내 진정성을 의심하는 시선들도 있다. 뭐, 다 좋다. 핫한 그룹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그리고 자주 지면과 방송에서 떠드는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일테다. 하지만 이건 꼭 말해두고 싶다. 내가 BTS라는 그룹에 오랜 시간 애정을 갖고 글을 쓰고 말을 해온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어쨌든 음악평론가로서 내 전체 커리어의 일부에 국한된 것이며, 평론가로서 내 유명세는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뿐 아니라 남들이 궁금해 하고,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야 하는 현실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진 부수적인 요소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 ‘혹시 아미세요?’라고 궁금해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그것은 음악평론가라는 직업에 대한 몰이해에서 기인하는 잘못된 선입관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시대에 ‘BTS 현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떤 것에 대한 흐름이 문화사적으로 의미 있다고 믿고, 그것을 제대로 전해주는 사람이 부족하다 여겼기에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해왔을 뿐 그게 한 개인의 어떤 선호도나 팬심을 드러내는 것은 될 수 없다. 오히려 내가 자주 이야기하는 그룹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 BTS에 대한 순수한 인간적인 관심이나 애정을 자기 검열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참 웃지 못 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난 BTS가 아니라 서태지와 아이들에 열광했던 X세대 평론가다. 내가 처음 평론계에 발을 들여놓으며 이야기했던 케이팝 아티스트들이 지금은 케이팝의 전설이 된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015B, 신해철과 같은 1990년대의 ‘신세대’ 케이팝 뮤지션들이었다. 그런 내가 이제 BTS 전문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으니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연식을 따져보면 1996년부터 25년이 넘게 활동을 해왔으니 그런대로 제법 ‘노장’ 축에 속하는 평론가지만, 강헌, 임진모 등 대중들에게 익숙한 선배들의 전성기가 워낙 길었던(?) 탓에 아직도 ‘뉴페이스’로 칭해지는 일이 흔하다.
돌이켜보면 90년대까지만 해도 음악평론가는 제법 폼 나는 직업 중 하나였다. 음악 잡지와 FM 라디오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방송에 나와 음악에 대해 그럴듯하게 떠드는 일이 나를 비롯한 청소년들의 눈에는 당연히 멋지게 보였을 법하다. 나는 굳이 구분하자면 소위 ‘인터넷 평론가’ 1세대라고 말할 수 있는데, 기존의 평론가들이 잡지나 음반 직배사를 통해 데뷔를 했다면 나는 PC 통신 게시판에 글을 올리며 유명세를 타게 된 경우다. 쓴 글들이 운 좋게 언론사의 눈에 띄여 이곳저곳 기고를 시작하며 돈을 받게 된 게 내 커리어의 시작이었다. 2007년에는 별안간 미국 유학을 떠났다. 제대로 음악공부를 하고픈 마음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학문과 필드를 경험한 음악학자이자 평론가의 길을 걷고 싶었던 욕심도 한몫했다. 결국 음악학으로 박사도 받고 현장에서 평론도 하고 있으니 얼추 비슷하게 근접한 셈이 되었지만 평론가로서 입지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음악평론이라는 분야 자체가 이미 존재감을 많이 상실했다. 2000년대 이후 전통적인 음반 시장이 몰락하고 mp3를 거쳐 이제는 온라인 스트리밍으로 음악 시장이 완전히 혁명적으로 재편되면서 음악평론가의 지위는 예전에 비해 보잘 것 없을 정도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적은 돈을 투자해 수천 년간의 음악 역사를 스마트폰을 통해 무한대로 즐길 수 있는 지금, 좋은 음반을 골라주는 ‘구매 가이드’로서 평론가의 역할은 사실상 무의미해졌다. 온 국민이 같은 채널을 보고 듣던 시대에는 국민가수나 국민가요 같은 말도 존재했고, 당연히 음악평론가가 아티스트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들은 보다 넓은 일반 대중들에게도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음악취향 자체가 파편화되고 있다. 각자 자신의 개인용 기기에서 저마다의 플레이리스트를 구축해 그 안에서 점점 취향이 고립되어 간다. 그에 따라 음악평론가들 역시 점점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알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영향력이나 유명세가 있다 해도 제한적인 것이 현실이고, 음악 전문 채널이나 방송이 실종된 지금 ‘누구도 읽지 않는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은 자괴감에 빠질 때가 적지 않다. 하지만 비관만 할 수는 없다. 아직 음악평론가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일들이 남았다.
나는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과 감상을 나누고 서로 공감 받고 싶어 한다고 믿는다. 다만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적을 뿐이다. 평론가는 그 담론과 논의의 공간을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정교한 언어와 지식으로 대중들의 감상을 대신 표현해주고 그들이 짚어내지 못하는 숨은 의미와 재미를 찾아내 작품을 더 의미 있고 감동적으로 즐길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불친절하기에 평론가는 직접적으로 설명하려 하지 않는 아티스트를 대신해 글과 말로 작품과 대중을 자연스레 연결하고 중재할 수도 있다. 물론 그 작업의 형태는 SNS에 올리는 한 줄의 글일 수도, 동영상 숏 폼 콘텐츠일 수도 있다. 작아진 파이에서 경쟁하고 나누려하기 보다는 기존 매체들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음악담론의 형태를 고민해야 할 것 같다. 영화, 게임, 드라마 등 즐길 것이 너무 많은 세상이지만 여전히 음악보다 더 매력적이고 흥미로우며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더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