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조선 천문학의

꽃을 피운, 이순지

많은 사람들이 세종대 과학자로 이천과 장영실을 떠올리지만,
업적으로 따지면 이순지를 첫 손가락에 꼽기도 한다.
이순지는 세종대 한국의 천문학을 세계 수준으로 올려놓은 천문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순지는 불과 20대 후반의 나이에 세종의 야심찬 프로젝트인 천문역법 사업의 책임자로 발탁되었다.
이후 중국과 아라비아 천문역법을 소화하여 편찬한 『칠정산외편』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이순지의 공헌으로 15세기 조선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관측과 계산을 통한 독자적인 역법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이순지는 어떤 인물인가

이순지는 어떤 인물인가
조선 전기 최고의 천문학자로 꼽히는 이순지(李純之, 1406∼1465)는 경기도 양성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태종과 세종 연간에 공조와 호조 참의 등을 지낸 이맹상이다. 이순지는 1427년(세종 9)에 문과에 급제하여 서운관 판사, 좌부승지 등을 거쳤고 문종 때에는 첨지중추원사, 호조참의 그리고 단종 때에는 예조참판, 호조참판을 지냈고 세조 때에는 지금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윤을 지냈다.
이순지는 장영실과 달리 양반 출신에 과거시험에도 급제한 문반관료이다. 세종의 명으로 천문 분야 일을 맡게 된 이순지는 서울의 북극고도를 38도 남짓으로 계산했다. 세종은 그의 계산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이후 중국에서 온 천문학자의 말을 듣고 이순지의 계산이 맞은 것을 확인하면서 이순지를 크게 신임하게 되었다. 북극고도란 오늘날로 치면 북위를 뜻한다. 현재의 서울은 38선 남쪽에 있다.
엄밀한 의미로 보면 이순지의 계산이 틀린 것처럼 보이지만 전통시대에는 도()의 뜻이 지금과는 약간 달랐다는 것을 이해하면 된다. 원의 둘레가 당시에는 지금처럼 360도가 아니라 365.25도였다. 그러니까 당시의 38도는 지금의 37도 40분과 들어맞는 값이다. 양반 신분으로 문과에 급제했던 이순지가 천문학에 대해 얼마나 조예가 깊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5세기 세계 최고의 천문계산술, 칠정산외편의 편찬

해시계

출범한 지 몇 십 년 밖에 안 된 조선왕조는 유교 이념과 왕실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천문역법의 정비가 절실했다.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는 중국의 역법을 빌려다가 쓰는 형편이었다. 고려 이후부터는 그것을 수도 개경 기준으로 약간 수정해서 사용했다. 근본적으로 우리나라 기준의 천체 운동 계산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세종은 조선에 맞는 역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맡은 인물이 바로 이순지였다.
세종의 천문 프로젝트가 성공한 것은 천문의기의 제작을 총감독한 이천과 이론적 뒷받침으로 역법을 교정한 이순지, 그리고 천문의기를 제작하고 개발한 장영실이라는 걸출한 인물들이 모인 결과였다. 세종의 천문 프로젝트는 출범한 지 불과 6년 만에 종결되었으니 실로 놀라움을 감출수가 없다.
세종시대에 제작된 천문의기는 비단 한 사람만의 작품이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일일이 이름이 거명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순지가 모두 관여했다고 추정하는 것 또한 무리가 아니다.
이순지는 세종의 천문 사업이 끝나자 서운관원(천문대장)으로 근무했다. 여기에서 유명한 『칠정산외편』이라는 책을 간행했다. 칠정산이란 ‘7개의 움직이는 별을 계산한다’란 뜻으로 해와 달, 5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의 위치를 계산하여 미리 예보하는 것을 말한다.
세종은 1431년 정흠지, 정초, 정인지 등에게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만들게 했고, 이순지와 김담에게는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편찬케 했다.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은 각각 1442년(세종 24)과 1444년에 편찬되었는데, 동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앞선 천문 계산술로 평가한다. 원나라 이후 명나라가 들어선 중국 천문학은 오히려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고 아랍 천문학은 더욱 퇴조의 기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순지는 세종의 과학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낸 뒤, 천문대인 간의대에서 천문연구를 계속하면서 『칠정산외편』 외에도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천문유초(天文類抄)』,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 등 천문관련 책을 편찬했다.
『제가역상집』은 1445년(세종 27) 그의 나이 40세 때 완성되었다. 임금의 명을 받아 천문과 역법, 의상(천문기구), 구루(해시계와 물시계) 등 세종 때 만든 여러 천문기구들에 대한 이론적 연구를 모아 정리한 것이다. 이순지가 편찬한 『천문유초』는 별자리를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는 동양의 기본 별자리인 28수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나오고 은하수도 설명되어 있다. 이외에도 천지, 해와 달, 5행성, 상서로운 별, 별똥별, 요성, 혜성, 객성 등에 대한 설명도 곁들어 있다. 특이한 천문 현상에 대해서는 점성술적인 해석을 했고 바람, 비, 눈, 이슬, 서리, 안개, 우박, 천둥, 번개 등 기상 현상 등도 상세하게 풀이되어 있다.

세종, 이순지를 놓아주지 않다

측우기를 사용하는 모습

조선시대는 천문이 음양학·수학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천문관서인 서운관이나 관상감은 천문은 기본이고 그 외의 음양학과 풍수도 다루는 곳이었다. 이순지는 천문뿐만 아니라 풍수지리학 분야에서도 대가로 유명했다. 세종과 세조 때 왕실의 묏자리 즉 장지를 결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세조는 음양과 지리 관련 일은 반드시 이순지와 논의하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세종이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는 1436년에 이순지가 모친상을 당했을 때 세종이 한 바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순지는 당시의 관습대로 삼년상을 치르느라 3년 동안 관직을 떠나 있었다. 유교적 관습으로 관료들은 부모상을 당하면 대개 벼슬을 버리고 시묘 살이라 하여 부모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슬픔을 다했다. 이 동안 이순지는 자신을 대신할 사람으로 승정원의 젊고 유능한 천문학자인 김담(金淡 1416∼1464)을 추천했다. 김담은 당시 20여 세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후 천문학자로서 이순지에 버금가는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하지만 세종은 20살의 김담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상 중인 이순지를 정4품의 자리로 승진시키면서 1년 만에 억지로 다시 불러들여 근무하게 했다. 3년상을 치르지 않고 관직에 있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조선시대의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였던 이순지는 1465년(세조 11)에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 그의 딸인 과부 이씨가 여장 노비 사방지와의 추문에 휘말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그 외엔 비교적 행복한 삶을 산 학자였다. 그는 아들 6명을 두었다. 후에 정평군(靖平君)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그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차산리(경기도 지방문화제 54호) 아파트 단지 옆에 자리해 있다. 조선이 낳은 위대한 과학자의 묘소로는 너무나 단출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