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15세기 동양 최고의

천문대, 간의대

천문과 관련된 세종의 위업 중 하나가 이른바 ‘간의대(簡儀臺)’ 사업이다.
간의대는 경복궁에 지은 세종의 왕립천문대를 말한다.
간의대는 세종대에 이룩된 과학기술의 핵심이자 당대 동아시아 최고의 천문대였다.
간의대는 한편으로 왕립천문대였다.
세종의 간의대 사업은 훈민정음 창제에 버금가는 역사적 위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종은 왕립천문대를 만들고 난 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으니 농사는 의식의 근원이고 왕정의 급선무이다”라고 했다.
유교적 민본주의의 중심에 농업이 있었고 그 배경에 천문학이 있었던 것이다.
세종대왕

조선의 천문대를 만들자

해시계, 물시계
학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해당 분야에 대한 이론적 탐색과 함께 사업을 담당할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한 법이다. 세종은 학문 연구의 기반을 조성하고 연구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집현전을 만들고 경연을 적극 활용했다.
세종은 경연 중에 정인지(鄭麟趾, 1396~1478)를 바라보며 “우리나라 제도가 항상 중국을 따랐으나 유일하게 하늘을 관측하는 기구만이 이를 따르지 못했다. 경이 대제학 정초와 함께 천문을 연구하여 관측하는 기구를 만들면 좋겠네”라고 하여 천문대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공식적으로 천문 사업을 천명하였지만, 사전에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할 세종이 아니었다. 세종은 즉위 초부터 왕립천문대를 건설할 원대한 꿈이 있었다. 조선의 왕이라면 제왕의 과학이라 불리는 천문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일찍이 태조 이성계가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이름의 천문도를 제작했고, 태종도 천문에 관심이 많아 왕실천문대를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뜻을 이루는지는 못했다. 많은 시간과 인력 그리고 경제적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세종은 중국 제도에서 벗어나 조선에 맞는 독자적인 천문 관측을 수행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서는 하늘을 관측하는 기구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준비는 다 되었다. 이미 장영실을 비롯한 천문가들을 중국에 보내는 등 새로운 천문기기를 제작할 기초도 갖춘 세종이었다.

천문대는 백성들의 농사를 위한 것

복원한 간의대

세종은 궁궐에 간의대를 설치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늘의 변화를 살펴 농사를 짓는 백성들에게 정확한 때를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천명했다. 천문 사업은 오로지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의미다. 간의대의 건설은 천문학적 의미 외에도 또 다른 상징성이 있었다. 하늘을 공경하고 재앙을 삼가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이는 법궁인 경복궁을 완성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궁궐에 천문의기를 설치하는 것은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다. 기원은 중국 요임금과 순임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에 따르면 요임금이 “희씨와 화씨에게 명하여 상제가 계신 큰 하늘을 공경하고 따르게 하시고 일월성신을 관측하여 공경히 사람들에게 농사지을 때를 받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요·순임금은 중국 고대 태평시대를 연 황제들로 유교국가의 국왕이라면 누구나 닮고 싶은 롤모델이었다. 특히 요임금은 하늘을 관측하여 백성들에게 농사지을 때를 알려준 최초의 황제였다. 요임금의 명을 받은 희씨와 화씨는 최초의 천문가들인 셈이다.
조선 건국에 앞장을 선 권근도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만들면서 “예로부터 제왕들이 하늘을 받들어 나라를 다스림에 책력(달력)과 천체관측기구를 만들어 때를 알려주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지 않음이 없었다”고 하여 국가를 다스리는데 천문학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그런 이유로 천문학은 국가의 주요 사업으로 발전했고 천문대는 궁궐 가까이에 늘 왕이 볼 수 있는 곳에 설치되었다.

호조판서 안순에게 간의대를 짓게 하다

경복궁도 중 간의대의 모습

간의대 건설은 천문 관측을 통해 그 현상을 정사에 정확히 반영하기 위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간의를 만들어 관측하기 위해서는 먼저 간의대라는 것을 만들어야 했다. 간의대를 제작하는 데는 대략 1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간의대는 경복궁 경회루 북쪽 편에 지어졌다. 간의대의 크기는 높이 31척, 길이 47척, 너비 32척이고 대() 위에 돌난간이 있었다. 이것을 다시 미터로 확산하면 높이는 약 6.4미터, 길이는 약 9.7미터, 너비는 약 6.6미터에 달한다. 높이가 6.4미터이면 아파트 1층의 높이가 대략 3미터 내외이므로 2층 정도 되는 높이다.
당시 간의대 축조를 담당한 이는 호조판서 안순(安純, 1371~1440)이었다. 세종대에는 가뭄이나 기근이 심한 날이 많았다. 1436년(세종 18) 전후로 몇 년째 전국적으로 흉작이 계속되면서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특히 충청도가 가장 심각했다. 세종은 10년 넘게 호조판서를 지낸 안순을 도순문진휼사로 임명해 충청도에 파견했다. 종1품 재상급 대신을 최고 구휼책임자로 임명한 것이다.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안순은 충청도 각 고을의 사정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재상급이었으니 충청지역 지방관들의 협조를 잘 이끌어 낼 수 있었다. 구휼 임무를 맡길 최적의 적임자였던 셈이다. 실제로 안순은 짧은 시간 안에 충청도 구휼에 성공했다. 이는 구휼조치의 모범사례가 됐다. 안순은 오랫동안 호조판서와 호조 일을 맡은 나라의 살림꾼이었다. 그는 주로 국가의 전곡(錢穀)을 관장했는데, 경비 출납에서 추호의 틀림이 없이 정확했다고 한다.
간의대 사업은 비용이 많이 드는 국가사업이었다. 천문대 사업에 호조판서를 임명한 것은 비용을 아끼기 위한 전략이었던 셈이다. 세종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인재 사용법을 알았던 최상의 리더였다.

7년 프로젝트의 완성

왕립천문대사업
간의를 제작하라는 세종의 명을 받은 예문관 제학 정인지와 대제학 정초는 옛날 천문 서적을 검토하고 조사하는 것을 맡았다. 실제 간의를 제작하는 일은 중추원사 이천과 호군 장영실이 맡았다. 일찍이 장영실은 세종의 명으로 명나라에서 곽수경의 간의를 익히고 돌아왔다. 간의 제작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은 장영실이었다. 장영실은 나무로 간의를 만들고 서울 한양의 북극고도를 측정했다. 장영실은 나무로 만들었던 천문의기들을 하나둘씩 구리를 녹여 만들어 나갔다.
1432년(세종 14) 간의대 건설을 시작으로 세종의 천문 사업은 총 7년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 이듬해인 1433년에 간의대가 축조되고 1434년에 자격루와 앙부일구, 1437년 일성정시의, 1438년(세종 20)에 흠경각 옥루 등이 완성되면서 왕립천문대사업이 종료되었다. 천문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두기 시작한 1420년 이후 18년 만에 오랜 꿈이 실현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