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눔

내 인생의 명장면

(격앙된 목소리로)
“오재원은 배트를 던졌고!”
혹시 이 열 글자를 읽고 장면이 떠오른다면 당신은 대한민국의 진짜 야구팬이다.
스포츠에서 역전의 순간은 아름답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나 선수가 경기의 판세를 뒤집는 역전의 순간은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특히 응원하는 우리 팀이나 선수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뒤집을 때는 더더욱 아름답다.
나에게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2015년 11월 19일에 찾아왔다. 그것도 일본에서.
일본은 2020 도쿄올림픽 개최에 성공한 후 야구를 정식종목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야구의 세계화를 위해 세계야구소프트볼연맹(WBSC)과 함께 프리미어12를 개최했다. 프리미어12는 WBSC의 랭킹 상위권 12개국이 세계최강팀을 가린다는 취지다. 전체적인 시나리오를 일본에서 짜다 보니 이 대회는 철저하게 일본이 유리했다. 일본은 일본에서만 경기를 치렀고 경기 시간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짰다. 선수들의 야구장 적응을 위한 훈련시간이나 이동시간도 철저히 일본이 기준이었다.
심지어 우리 대표팀은 일본에서 개막전을 치른 뒤 대만에서 일주일 동안 예선 경기에 참가하고, 대만에서의 마지막 경기 후 이튿날 오전 일본으로 이동, 오후에 잠깐 적응 훈련을 하고 다음날 경기를 치르는 지옥의 일정이었다. 우리 대표팀은 점점 지쳐갔고 일본의 계획대로 그들은 1회 대회 우승을 차지하기에 매우 유력했다. 적어도 준결승에서 한국을 만나기 전까지. 심지어 그들이 우리나라를 만나서 9회에 돌입했던, 경기 종료에 단 세 개의 아웃카운트만을 남겨두고 있었던 그 순간까지는 말이다.
2015년 11월 19일, 준결승 한일전 9회초. 우리는 0:3으로 뒤쳐져 있었다. 일본의 괴물투수 오타니는 대회 개막전에서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완벽한 투구를 했다. 두 번째 대결에서는 오타니의 공을 공략할 수 있다고 자신했던 우리 대표팀의 타자들은 경기 내내 침묵으로 일관했다. 심지어 우리는 내야수비의 실책까지 겹치면서 3점을 내줬다. 일본 투수는 오타니만 좋은 투수가 아니었다. 8회에 올라온 노리모토도 시속 155km에 이르는 강속구를 던졌다. 이 경기를 뒤집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KAERI 안전문화 서포터즈 발대식
그렇게 9회가 시작됐고 대타 오재원이 타석에 들어왔다. 오재원이라는 선수를 일컬어 ‘우리 팀일 때는 최고지만 상대팀일 때는 가장 얄미운 선수’라고도 한다. 그는 포커페이스를 강조하는 야구의 통념과는 다르게 감정을 있는 그대로 얼굴에 드러낸다. 그날도 그랬다. 그는 의도적으로 타석에서 시간을 끌면서 마운드 위의 일본 투수 노리모토를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들였다. 변화구를 커트하면서 노리모토의 투구 수를 늘렸고, 마운드 위의 노리모토가 다음 공을 던지기 위해서 기다리는 동안 매번 본인 특유의 동작을 취하면서 거의 30초 가까이 시간을 끌며 노리모토의 마음을 흔들었다. 결국 노리모토의 빠른 공을 때려서 안타 출루에 성공한 그는 1루로 달려가면서 마치 경기에 이기기라도 한 듯 박수를 치고 일본의 덕아웃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면서 고함을 질렀다. 놀랍게도 오재원의 그 기합은 그 직전까지 잠들어 있던 우리 대표팀의 타선을 깨웠다.
이후 우리 대표팀은 안타와 볼넷 출루를 줄줄이 이어갔고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의 역전타로 내내 끌려가던 경기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 같은 9회, 기적의 역전을 이끌었던 오재원이 또 타석에 나왔다. 2사 만루에 투수는 마쓰이. 오재원은 이 타석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오재원의 이 타석의 모든 순간들이 내 인생의 명장면이다. 오재원은 매섭게 배트를 돌렸다. 그것도 매우 크게. 공은 높게 떠올랐다. 오재원은 배트를 저 멀리 던져 놓고 홈런을 확신하는 제스처와 함께 당당하게 1루 쪽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오재원의 타구. 우중간 깊습니다! 오재원은 배트를 던졌고!”
나는 이렇게 외쳤다. 아마 내가 스포츠 중계방송을 시작한 이후 가장 큰 볼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타구는 담장 바로 앞에서 뚝 떨어지면서 상대 중견수에게 잡히고 말았다. 오재원은 1루로 가는 길 위에 웃으면서 주저앉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머쓱하게 웃는 그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 이게 안 넘어가네? 좀 창피한데?’
이 장면은 비록 실패의 장면이지만 내가 본 그 어느 순간보다 아름다웠다. 경기의 흐름을 통째로 바꿔 놓았던 한 선수가 마지막 힘을 짜내서 담장 바로 앞까지 날렸던 타구. 결과는 아웃이었지만 그 타구가 떠가는 3~4초의 순간만은 그 어떤 순간보다 가슴이 벅찼다. 나는 지금도 가끔씩 그 순간을 떠올려본다. 과연 오재원의 그 타구가 홈런이 됐다면 이어진 내 멘트는 뭐였을까?
“오재원은 배트를 던졌고!”
나의 멘트가 뭐였건 각 방송사 애국가 화면에 오재원의 홈런 장면이 포함됐을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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