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 속 과학읽기

2200년 전 하이테크
세형동검 거푸집 출현한

전주 갈동은 고조선 준왕의 망명지?

세형동검 거푸집

“가슴이 콩닥콩닥 거렸습니다. 아! 세형동검 거푸집이 바로 이 무덤에서 현현하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2003년 8월 1일 전북 완주 갈동 유적을 발굴 중이던 호남문화재연구원의 한수영 책임조사원(현 고 고문화연구원장)은 ‘대박 발굴’의 주인공이 된다. 벽에 붙어있던 것 1점, 옆으로 기울어져 있던 것 1점 총 한 쌍의 세형동검거푸집을 움무덤에서 발견한 것이다.

정확한 출처는 몰랐지만

‘청동 거푸집(쇳물을 부어 청동기를 제작하는 틀)’으로 유명한 유물 세트가 있다. 1986년 국보로 지정된 ‘전(傳) 영암 출토 청동거푸집’(숭실대 박물관 소장)이다. 8종으로 구성된 거푸집 세트로는 세형단검·꺾창·창·낚시 바늘·침·소형도끼·끌 등 24점의 청동제품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유물 세트에는 결정적인 흠이 있었다. 전남 영암 학산면 독천리에서 출도됐다는 이야기만 전해질 뿐 정확한 출토지점을 모른다는 것이다. 출토 지점이 정확하지 않으면 학술적인 생명력을 얻기 힘들다. 때문에 ‘전(傳) 영암 출토’가 붙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 ‘거푸집 세트’는 국보가 됐다. 이유가 무엇일까. 일제강점기에 학자들은 “한반도에는 청동기시대가 존재하지 않았다”며 “석기시대에 머물러 있다가 중국의 침략을 받아 청동기와 철기 문물이 한꺼번에 유입됐다”라고 주장했다. 이때 석기와 금속기가 함께 쓰인 시기라는 뜻의 ‘금석병용기’가 등장하여 하나의 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거푸집 세트’가 출토 되었으니 기원전 2~3세기에 국내의 주조기술로 청동제품을 대량 제작한 증거가 생겨난 셈 아닌가. 그래서 ‘전(傳) 영암 출토 청동거푸집’이 국보가 된 것이다.

독창적인 한국식 동검

2002년 5월 어느날, 전주시 관내 국도의 우회도로 건설을 위해 지표 조사를 하던 한수영 책임조사원은 전북 완주 이서면 반교리 갈동 마을을 정식발굴지역에 포함시켰다. 정식 발굴이 한창이던 2003년 8월 1일, ‘출토 지점=완주 갈동’이라는‘100% 인증 청동거푸집’이 출토되었다. 특히 이 거푸집이 세형동검을 대량 생산한 거푸집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세형동검(細形銅劍)’은 검의 몸체가 좁고 가늘다고 해서 이름 붙은 청동검이다. 청동검 하면 중국 라오닝(요령·遼寧)에 주로 분포하는 ‘비파형동검(요령식 동검·고조선식 동검)’이 유명한데, 이동검은 고조선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유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전 후 한반도에서 개발된 독창적인 청동검이 있으니, 바로 한국식 동검이라고도 하는 세형동검이다. 그런 ‘세형동검 거푸집’이 완주 갈동(기원전 2세기추정)에서 출토됐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
‘세형동검 거푸집’은 한반도에서 청동기시대가 존재했다는것에 대한 증거는 물론이고 고유의 청동검을 대량으로 생산했음을 보여주는 ‘100% 확실한 물증’이었다. 출토된 거푸집은 세형동검(한국식 동검)을 만드는 ‘한 쌍(합범·合范)’이었다. 짝을 맞추기 위해 새긴 짧은 표시선이 보였고, 안쪽에 검게 그을린 부분이 확인되었다. 거푸집을 여러 번 사용했다는 증거다. 그런데 한쪽의 뒷면에 청동 꺾창(ㄱ자가 되도록 나무에 끼워 말에 탄 적병을 낚아 베는 무기)의 한쪽 틀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이는 본래 ‘청동 꺾창’의 합범(2개의 틀을 맞춘 거푸집)으로 제작·사용되다가 한쪽이 파손되자 나머지 한쪽을 ‘세형동검 거푸집’으로 재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갈동출토 거푸집은 엄밀히 말해 ‘세형동검(1쌍)’과 ‘청동꺾창(0.5쌍)’두 종이었던 것이다.
각종 청동기류와 철기류

‘보물’ 고운무늬 거울까지 출현

뜻밖의 ‘거푸집’ 출현으로 도로의 노선이 변경됐다. 그런데 2007년 변경노선의 발굴에서도 놀랄만한 유물이 출토됐다. 5호와 7호 움무덤에서 ‘고운무늬 거울(정문경)’이 1점씩, 14호 움무덤에서 세형동검 1자루가 출토된 것이다. 두 점의 거울 뒷면에 새겨진 문양은 유명한 ‘국보경(숭실대 박물관 소장)’에 버금갈 정도로 정밀하다는 평을 받았다.
출토된 세형동검(길이 29 ㎝)은 2003년 출토된 세형동검 거푸집에서 찍어낸 것과 모양이 달랐다. 그러나 같은 장인 집단이 생산한 제품으로 추정됐다. 연마한 흔적이 역력했고, 찌르고 베기 편하도록 길쭉한 형태를 갖추었다. 검 몸체에 얕은 홈이 마련된 것으로 보아 쉽게 찌르고 뺄 수 있도록 만든 듯했다. 날의 폭이 넓어 의례용 가능성이 짙은 이전의 청동검과 달리 실용성에 초점을 맞춘 것이 분명하다. 갈동 출토 ‘거푸집 세트(2003년 출토)’와 ‘고운무늬 거울 2점(2007년 출토)’은 모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됐다.
하지만 이는 서막에 불과했다. 2000년대 초 전주 혁신도시 부지로 선정된 인근지역에서도 갈동 유적과 비슷한 철기시대 초기의 유구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갈동에서 600 m 떨어진 전주 원장동에서는 세형검 5점과 칼자루끝장식 3점, 고운무늬거울 2점 등 각종 청동제품이 출토됐다. 또 완주 신풍에서는 81기의 초기철기시대 무덤군이 노출됐다. 게다가 고운무늬 거울이 10점이나 출토됐고, ‘청동투겁방울(장대의 머리에 끼운 방울)’이 한 쌍 확인됐다. 이곳에서는 청동기보다는 철기가 유독 많이 보인다. 이 역시 청동기-철기의 과도기를 증명하는 무덤양상이다. 이렇게 갈동·원장동·신풍 등에서 200기가 넘는 철기시대 초기(기원전 2세기 무렵)의 무덤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집계됐다. 2200년 전의 최첨단 하이테크 산업기지였던 것이다.
청동투겁방울

각종 청동기와 철기류

완주에서 웬 중국식 동검 26점이?

1970년대 전북지역에서 아주 흥미로운 청동기 세트가 무더기로 발견된 적이 있다. 1975년 11월 30일 완주 상림리 주민이 묘목을 옮겨 심다가 청동검 26점을 발견한 것이다. 무덤도, 주거지도 아닌 곳에 동검 더미만 덜렁 묻혀있었다. 거기에 형태나 기법으로 보아 중국 산둥(山東) 지역에 웅거했던 전국시대 제나라 동검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파악됐으며, 유물의 연대는 기원전 3세기 무렵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직구’한 제품은 아닌 것으로 추정됐다. 크기가 중국산보다는 다소 작고, 또 두께도 얇아서 비실용적이었다. 일부 납 성분의 산지도 한반도로 추정되었다.
그렇다면 왜 중국 산둥산을 본뜬 청동검을 26점이나 제작해서 고이 묻은 걸까. 기원전 3세기는 중국의 대격변기였다. 6국을 통일(기원전 221년)한 진나라가 진시황의 객사(기원전 210년) 이후 4년(기원전 206년) 만에 멸망한다. 이 무렵 수많은 난민이 살 길을 찾아 한반도로 피란했다. 그중 산둥 반도에 웅거했던 제나라의 전횡(기원전 250년~202년) 관련 설화가 눈길을끈다. 전횡은 진시황에 의해 멸망한 제나라 왕족이다. 제나라를 재건하려다가 실패한 뒤 한나라 건국(기원전 202년) 후 산둥성 칭다오(靑島)의 외딴 섬에 숨어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때 전횡 문하의 빈객 500명도 따라 죽었다
그런데 전북 군산에서 가장 서쪽 섬인 어청도에서 전횡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전횡과 그 일행 500명이 망명길에 올라 3개월 만에 어청도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지금 어청도에는 전횡을 모시는 ‘치동묘(淄東廟)’가 자리 잡고 있다. ‘치동묘’는 제나라 도읍인 임치의 동쪽 사당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 설화는 기원전 3세기 대격변기를 겪던 중국 대륙에서 수많은 유이민이 한반도로 건너왔음을 상징해준다. 그들이 바로 고향인 산둥풍의 청동검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한반도산 재료를 써서….
국립전주박물관에 전시된 완주 상림리 출토 중국계 청동검 26자루

고조선 준왕의 망명지인가

갈동 등에서 쏟아진 기원전 2세기 문화와 관련해서도 주목되는 해석이 있다. 기원전 194년 무렵 고조선에 정변이 일어났다. 고조선 준왕(생몰년 미상)이 중국 망명객 출신인 위만(생몰년 미상)의 반란으로 쫓겨난 것이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은 “준왕 이 신하들을 이끌고 바다를 경유하여 한(韓)의 땅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을 칭했다”고 전했다. 그 기록 때문일까. 전북 지역에는 준왕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진다.
군산의 북동쪽 끝자락에 있는 원나포(나리포 혹은 나시포)는 준왕의 첫 상륙지로, 공주산(公主山)은 준왕의 공주가 머문 곳으로 알려져 있다. 또 공주산의 건넛마을에는 임금(준왕)이 온곳이라 해서 어래산(御來山)이라 한다. 게다가 <후한서> ‘동이 전·마한’조 등은 “준왕이 마한에서 왕이 된 후 대가 끊어졌고, 지금은 마한 사람이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갈동 등 전북 지역에서는 기원후 1세기 이후의 문화층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이 ‘준왕의 후손이 끊어졌다’는 <후한서>의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대목이 아닐까. 이는 발굴 20주년을 맞이한 갈동유적이 전해주는 2200년 전의 역사이야기이다.